"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전재오가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가끔 윌리엄이 말을 걸면 아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서히 기쁨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내가 학생들을 맞으러 나오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그녀가 아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렇게 거듭 사과하는 것이 아내의 부재를 설명해주기보다 오히려 강조한다는 사실을 그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자신의 침묵이 설명보다 덜 구차하기를 바랐다.

 

 

스토너가 말했다. "장모님께 말씀드려요."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원하신다면 우리랑 같이 사셔도 된다고. 장모님을 환영하겠다고 말이오."

이디스는 애정과 경멸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윌리. 어머니는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실분이에요. 그걸 몰라요?"

 

 

언제든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는 이디스를 생각할 때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조용한 후회가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엾은 윌리." 그러고는 다시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달라졌어." 그녀가 딸에게 말했다. "정말 달라진 것 같아."

윌리엄 스토너는 이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왠지 이디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에게 새로이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디스의 새로운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은 그에게 아주 조금 성가실 뿐이었고, 그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필사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지만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든 상대에 대해서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균형이 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토너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결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야 비로소 이디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난 1년 동안 아이가 많이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싫지만은 않은 작은 슬픔에 윌리엄은 잠깐 목이 메었다.

 

"아이가 얼마나 불행한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그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렸다.

 

이 일의 중대한 의미가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여러 주가 지난 뒤에야 이디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인정할 수 있었다.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그레이스가 가엾어요. 애가 아버지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아이 아버지는 시간이 없어서 아이랑 놀아주질 못하거든요. 아시죠? 연구때문에요. 게다가 새로운 저서를 시작해서......"

 

그가 말을 걸고 그레이스가 대답하기라도 하면 이디스가 곧 그레이스의 식사예절이나 앉은 자세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기 때문이었다. 이디스의 말투가 어찌나 신랄한지 아이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풀이 죽어서 침묵을 지키곤 했다. 

 

 

어쩌다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유령이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윌리, 내가 그레이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요. 그건 알아두세요. 난 그 아이를 사랑해요. 내 딸이니까요."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이를 사랑했다. 이것이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을 뻔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자기가 멋대로 짐을 옮겨도 그가 개의치 않을 줄 알고 있었다면, 유리로 둘러싸인 집 뒤의 일광욕실을 쓰라고 말했다.

 

 

몇 주 뒤에는 그레이스가 제 엄마의 허락을 얻어 친구들과 함께 그 방에서 노는 바람에 그의 메모들과 새로운 저서의 원고 앞부분이 찢어지거나 훼손되었다. "그냥 몇 분만 거기서 놀라고 했어요." 이디스가 말했다. "아이들도 놀 데가 있어야죠. 그런데 달리 생각나는 데가 없지 뭐예요. 당신이 그레이스한테 말해요. 당신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이ㅣㅁ 말했는데."

 그때 그는 포기해버렸다.

 

 

마침내 그는 밤에 연구실로 나오는 것이 자신에게 일종의 피난이자 구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약간의 위안과 기쁨, 심지어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공부에서 예전에 느꼈던 즐거움의 흔적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에는 차갑고 계산적이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쓸데없이 무모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느껴질 만큼 신중했다. 스토너는 자신이 미처 대처할 수단을 생각해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대담한 허장성세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수업을 건성으로 들은 학생이라도, 워커가 완전히 즉흥적인 공연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비굴함과 오만이 묘하게 뒤섞인 표정이었다.

 

 

스토너는 히스테리 환자처럼 웃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스토너는 거의 경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래, 자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일세. 하지만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야. 자네가 말한 그런 식은 아닐세."

 

 

그는 친구와 적 모두 자신의 존재를 난처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렇게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스토너는 갑작스레 감정을 터뜨린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스토너가 심호흡을 하자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쭉날쭉한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개 속에서 반짝였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힘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나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는 안개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정숙함을 던져버릴 이유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정숙해 보이는지!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끔 내가 세계 최고의 헤픈 여자가 된 것 같아요. 헤프지만 열정적이고 신실한 여지. 그 정도면 정숙해 보이나요?"

 

 

그는 완벽을 꿈꿨다. 두 사람이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는 세상.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절반쯤은 믿고 있었다. "그런 세상이 되면 어떨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세상을 펼쳐 보였지만, 그 세상은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공들여 상상하는 것들이 사실은 사랑의 제스처이며, 지금 함께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한 축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빌, 우리가 앞으로 다른 것을 결코 누릴 수 없게 된다 해도, 이번 주의 기억은 남아 있을 거예요. 너무 소녀 같은 말인가요?"

"그것이 소녀 같은 말이든 아니든 상관없소." 스토너가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말이 사실이니까."

"그럼 말할래요." 캐서린이 말했다. "이번 주의 기억은 우리에게 남아 있을 거예요."

 

"경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기대치를 결정한 것처럼, 중세 사람들의 기대치도 습관에 의해 결정되었으니까요. 먼저 기본적인 공부를 위해 중세사람들의 살모가 생각과 글을 결정했던 마음의 습관들을 몇가지 살펴봅시다....."

 

 

그가 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넬 때면, 이디스는 둘 중 한명이나 두 사람 모두에게 벌컥 화를 냈다. 스토너는 그녀의 모든 행동, 즉 분노, 고뇌, 고함, 증오에 찬 침묵 등을 모두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일부러 애를 써도 그것에 대해 고작 형식적인 관심밖에 보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디스는 기뻐했다. "봤죠?" 공연히 의기양양해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신이 그레이스의 '인기' 문제를 미친 듯이 공격한 뒤로 지나간 3년 여의 세월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봤죠? 내가 옳았어요. 아이를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윌리는 좋아하지 않았죠. 어머, 난 다 알아봤어요. 윌리는 좋아하는 법이 없다는걸."

 

 

이디스는 딸의 인기가 점점 높아진다며 기뻐했다. "애가 엄마를 닮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 엄마도 아주 인기가 많았거든요. 청년들이 전부..... 아버지는 그 청년들한테 엄청 화를 내곤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주 자랑스러워했어요. 난 다 알아봤어요."

"그래요, 이디스." 스토너는 부드럽게 말했다.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를 바라보아도 후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주름 없는 젊은 얼굴처럼 보였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왓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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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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