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가 모두 미(美)를 미로 알지만
이는 추함이 있기 때문이요,
선(善)을 선으로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고
악기소리(音)와 목소리(聲)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따라서 성인은 무위의 일(無爲之事)에 몸을 두고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한다.
만사가 생겨나도 개의치 아니하고
만물이 생겨나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어떤 일을 행해도 거기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거기 머룰려 하지 않는다.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 아름다움과 추함
아무리 긴 것도 자기보다 더 긴 것을 만나면 짧다. 아무리 짧아도 자기보다 더 짧은 것을 만나면 길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 긴 것도 업속, 그 자체로 짧은 것도 없다.
나. 상대성의 철학
짧은 소견으로는 세상이 직선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시야가 편벽되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오이다. 세상을 직선이라고 보면 만사가 분명하고 선후가 뚜렷하여 무언가 인생이 명확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명이 발생한 이래 사물에 대해 정의내리고, 개념을 정하고, 기준을 잡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시비분별하여왔다. 이 모든 것이 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갖다 붙인 '영원하지 않은 이름(非常名)'들인 것이다.
그것들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잠시 우리 인생살이를 명확히 해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은 근본적인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러한 분류법을 별 생각 없이 계속 따르다보면 점점 이름과 실재를 혼동하게 되어 나중에는 사물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은 '이름'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다만 그렇게 약속하고, 그렇게 이름 지어, 그렇게 통용시키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름에는 실재가 없다.
그러니 이름에 사로잡히지 마라. 미추라는 이름, 선악이라는 이름, 장단고저라는 이름, 그런 이름들에 너무 혹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미(美)의 개념, 자기가 아는 선(善)을 개념을 너무 절대시하여 남 앞에 강요하지 마라. 그대는 지금 커다란 원의 일부분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 무위(無爲)
세계가 이렇게 속속들이 상대적임을 안 사람은 남들에게 무언가를 핏대 높여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위(無爲)란 무엇인가? 무위란 '행위(行爲)'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人爲)' 없음을 말한다. 무위에는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창조적 행위가 들어있다. 사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행위들은 거의가 다 무위에서 나온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순수하다. 무위는 투명하다. 무위는 사심(私心)이 없다. 무위에는 행위자가 없다. 무위란 행위자 없는 행위이다. 요컨대 무위란 무아(無我)이다. 무위란 무아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의 행동양식이다. 뛰어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다 용어는 다를지언정 이 복된 무위의 근처에 당도한 사람들이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무위를 몸에 익힌 사람이다. 그는 무위의 참 뜻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큰소리로 말하지도 않고, 힘주어 말하지도 않느낟. 그는 특별히 무엇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를 입는다. 이른바 무언의 가르침이요 불언지교(不言之敎)이다. 그는 심오한 것을 간직하고 있고, 말없는 말로써 그것을 슬쩍 보여줄 뿐이다.
만사가 생겨나도 개의치 아니하고
만물이 일어나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어떤 일을 행해도 거기 기대려 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거기 머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미추와 선악과 장단과 고저가 모두 상대적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사가 발흥해도 별로 개의치 아니하며, 만물이 일시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싸도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오늘의 미(美)가 내일의 추(醜)가 될 수 있고, 한번 선(善)했던 것이 한번 악(惡)해질 수 있음을 안다.
그는 한번 길었던 것이 한번 짧아질 수 있고, 한번 높이 솟아 위세를 떨쳤던 것이 한번 굴러 떨어져 나락에 처박힐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행해서 완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기대어 득보려 하는 것은 치사한 일이다. 그렇게되면 애초의 좋았던 의도마저 퇴색되고 만다.
이것이 우리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의 차이이다. 범인은 공을 이루어 놓고도 입으로 그 공을 다 깬다. 매사에 말이 앞선다 .이른바 다언지교(多言之敎)이다. 이것이 우리 범인의 행동양식이다. 허나, 성인은 다르게 행동한다.
공을 이루어도 거기 머물려 하지 않는다.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무위(無爲)의 체득자인 성인의 행동양식이다. 그는 자기의 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함구한다. 이른바 불언지교(不言之敎)이다. 그 불언(不言)의 덕에 그는 영원히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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