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공통분모다. 그리고 인류의 공통분모는 내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마련되어 있다. 지금의 너와 나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공통분모.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1 역사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요청은 자본주의만의 특성은 아니다. '신'을 요청할 수 없는 모든 지배 권력은 애국을 장려한다.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절 대화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신'과 '국가'의 존재를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국가'의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해서 사회정치적으로 과장되고 포장된 의미가 나에게 강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은 두 가지다. 생산수단과 공급과잉. 이 두 개념이 역사를 움직여왔다. 생산수단과 공급과잉은 공통점이 있다. 두 개념 모두 경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움직여온 핵심이 '경제'인 것이다.
2 경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 잉여생산물 모두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지만, 잉여생산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신자유주의는 정부 개입이 없다는 점에서 초기 자본주의와 동일한 문제점을 갖는다. 먼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에 의한 독점 현상이 일어난다. 다음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는 계속 승리하고 누군가는 계속 희생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사안이 복잡해 보일 때 그것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안으로 인해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입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산주의 : 이런 사회는 어떤가?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기에,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는 사회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 실제로 진행되었고, 논란의 소지는 있으나 일단 실패로 끝난 듯 보인다. 실패 원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우선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근본적 원인으로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할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러한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본능적으로 계급과 서열을 중시한다. 다수가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라도 소수가 불평등을 추구할 때, 그 사회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이고 불가능한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소유를 유지하고 분배하는 존재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람이다. 즉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소수가 권력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노동자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 전체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한을 갖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탄생한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는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강탈하고 자신들을 없애려는 악마처럼 보였다. 자본가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지켜주길 기대했다. 이에 따라 일부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갈등을 선과 악의 문제로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형성해갔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수호하는 선이고, 반대로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악이라고 국민들을 교육하고 설득했다. 이것은 지배자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요청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체제는 종교가 아니고 선악의 문제도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용과 이익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경제체제가 나와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경제체제는 이념과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 체제를 비판하거나 다른 체제의 가능성을 말하는 이가 이단이 되어 종교재판을 받는 것은 합리적인 현대인들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3 정치
정치란 단순히 '경제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하나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우리는 이를 '정치적 보수'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우리는 이를 '정치적 진보'라고 부른다.
당신은 세상이, 물론 문제점들이 있으나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문제가 많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세상이라는 어휘 자체가 막연하지만 일단은 추상적인 상태로 남겨두고 답해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가?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타인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한다. 세상이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안정적인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니, 그 문제는 사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일탈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이 문제가 많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사회가 이미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정상적인 개인이라도 그 부조리한 상황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각은 존재하지만, 틀린 시각이란 없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타자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진 않을지라도 매우 소모적이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진보' 혹은 '좌파'라고 한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입장을 비판하고, 정부의 개입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는 입장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도 여기에 포함되고, 아예 산업화나 국까 자체를 비판하는 환경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도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진보에 포함된다.
이렇게 후기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진보로 분류된다는 언어적 문제는 한국 근현대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 등의 후기 자본주의자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순수하게 언어적 혼란 때문에 발생한 문제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분이 의도적으로 은폐된 면이 없지 않다. 자신의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 집단은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역사적인 맥락에서 한국인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를 후기 자본주의와 함께 묶음으로써 대중들이 후기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수와 진보의 궁극적인 차이는 세금과 연결되어 있다. 보수는 세금을 낮추고 복지도 줄이려는 방향성을 갖는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러한 경제적 입장이 초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다. 반면 진보는 점직전으로 세금을 올리고 복지를 늘리려는 방향성을 갖는다.
오늘날은 미디어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을 넘어선다는 것에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단적으로 말해서, 객관적인 언론과 방송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허상에 가깝다. 객관적인 미디어는 없다. 이 사실을 전제하고 언론과 방송을 접해야 그나마 객관적 사실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주관적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적으로 수익 구조 때문이다. 언론사와 방송사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오직 광고 수익을 통해서다. 사업 유지를 위한 모든 수익이 기업으로부터 나오니, 언론과 방송은 필연적으로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거대한 재벌그룹은 언론사와 방송사에 가장 중요한 고객이다. 그래서 미디어는 재벌그룹의 비리에 소극적인 태도가 되고, 재벌그룹의 성과를 과대포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디어는 객관적 사실 전달의 의무를 상실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함으로써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미디어의 수익 구조의 특성은 한국 사회에서 보수 정당이 지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주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대중은 미디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미디어는 정보를 얻는 수단을 넘어 준거의 틀로 작용한다.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택하는데 신중하지 않은 대중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를 토대로 선호 정당을 결정한다. 대중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무관심해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기 귀찮아한다. 미디어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 대중이 봐야 할 곳을 친절하고 세련되게 가르쳐준다.
날카로운 풍자와 시사가 배제된 예능은 대중의 말초적 재미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의 오락적 기능은 대중들에게 사회 체제의 압박을 숨기고 도피하게 기능한다.
우리가 보수 정당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대리자 한 명을 뽑아준 것이 아니라 경제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 시장 자유 확대, 세금 인하, 복지 축소,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 국가 전체의 성장, 치열한 경쟁을 선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보 정당에 투표한다면, 그것은 진보 정치인 한 명을 선출한 것이 아니라 수정 자본주의, 정부 개입 확대, 세금 인상, 복지 확대, 노동자와 서민의 이익, 최소수혜자의 삶의 질 향상, 경쟁 지양 및 협력적 분위기 형성을 선택한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은, 혹시나 자신의 판단이 틀려서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는 것보다는 대중의 판단에 자신의 판단을 맞춰서 안정감을 얻는 편을 택하고자 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이상적인 정치는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독재자. 엘리트는 불필요하다. 정치에서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인물이 정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서 충돌하는 이해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이견을 조율할 절차가 마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여건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의 비현실성을 압도한다.
4 사회
개인주의가 극단화되면 이기주의가 되고, 집단주의가 극단화되면 전체주의가 된다.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5 윤리
칸트 정언명법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네가 개인적으로 하려는 일이 동시네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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