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옳은일하기
분노는 자격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특별한 종류의 화다. 다시 말해, 부당함에 대한 화다.
2강. 최대 행복 원칙
옳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단지 결과를, 즉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덕은 그 이상을, 즉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적절한 방식을 내포한다.
도덕은 목숨의 숫자를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의무와 인권은 워낙 기본적인 덕목이라 그러한 계산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게 밀의 주장이다.
밀은 개인의 자유 옹호는 전적으로 공리주의 사고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내가 막연한 권리 덕에 남보다 유리한 입장에 선다고 판단된다면, 그런 이익은 공리와 무관한 것이어서 거부하겠노라고 말하겠다. 나는 공리가 궁극적으로 모든 윤리적 질문에 호소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의 공리는 넓은 의미의 공리라야 하고,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공리라야한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 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탐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또는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행동과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격도 중요하다.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3강. 우리는 우리 자신을소유하는가?
공리주의 논리는 꽤 급진적인 부의 재분배를 옹호하는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부자들의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데, 이를테면 그로인해 게이츠가 받는 타격이 돈을 받는 사람들이 얻는 혜택보다 더 커지는 순간 멈추는 식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1960) 에서, 경제 평등을 성취하려는 시도는 하나같이 강압적이고, 자유 사회를 파괴하게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국가가 할 일이라고 널리 인식된 행위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 행위라고 주장했다.
"오직 계약을 집행하고, 사람들을 무력과 절도와 사기에서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최소국가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떤 일도 강요받지 말아야 하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고, 그런 국가는 정당화될 수 없다."
내가 내 몸, 내 삶, 나라는 인간을 소유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다룰 자유를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 이 생각은 제법 설득력이 있지만, 그 의미를 모두 받아들이기란 쉽지않다.
4강. 대리인 고용하기
지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
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연관관계를 볼수 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이와 정반대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저 밖에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바로 이것이 사람과사물의 차이점이다. 칸트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공리주의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칸트는 단지 의무 동기만이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할 뿐, 우리에게 특별히 어떤 의무가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도덕의 최고 원칙이 무엇을 명령하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때 그 동기를 따질 뿐,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옳은 일을 하며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옳은 이유로 옳은 행동을 했다면, 그때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진 않는다. 칸트가 말한 이티주의자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돕는 이유가 단지 그 행위에서 느끼는 쾌락 때문이라면, 그 행동엔 도덕적 가치가 부족하다. 그러나 타인을 도울 의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면, 거기서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진 않는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정언’이라는 말이 전문 용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흔히 쓰는 말과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정언명렁 1 :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
보편화하는 것은강도높은도덕적 요구에 초점을맞춰, 내가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처지보다 내 이익과 처지를 앞세우지 않는지 점검하게한다.
정언명령 2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가 보기에, 자살도 같은 이유로 정언명령을 위반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면, 나를 고통 완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듯이, 인간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 이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내게도 없다. 칸트 생각에, 자살이 잘못인 이유는 타살이 잘못인 이유와 똑같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면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디는 점에서 둘 다 마찬가지다.
존중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애착과는 다르다 사랑, 공감, 연대감, 동료 의식은 타인 중에서도 특정한 타인에게 더 끌리는 도덕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승}는 이유는 그러한 감정과는 관련이 없다. 칸트식 존중은 사랑과는 다르다. 공감과도 다르다 연대감이나 동료 의식과도 다르다.
그러나 칸트식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기에,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와 똑같이 용납될 수 없다. 또 그렇기에, 칸트의 존중 원칙은 보편 인권 원칙과도 통한다. 칸트가 생각핸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가 어디에 살든,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잘 알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한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이익을 기초로 한 원칙은 "언제나 조건적이며, 도덕법이 될 수 없다"
즉 반드시 지켜야하는 법칙을 나 스스로 정했을 때만 양립한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은 도덕법에 종속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바로 그 법"을 정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법에 종속되는 데" 있다. 우리는 정언명령에 따를 때 우리가 선택한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능력에 달렸다 자신이 만든법에 스스로 종속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말하면, 도덕은 경험적이지 않다. 그것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판결을 내린다 과학은 힘과 통찰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도덕적 물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과학은 감각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유지상주의의 자기소유 개념과는 정반대로, 칸트는 우리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보니 , 우리 몸과 우리 자신을 다루는 방식이 제한된다 "인간은 자신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다."
우리가 의지를 발휘해 만든 도덕법은,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대할 때는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 요구는 비록 자율에 근거하지만, 합의한 성인들끼리의 행동이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존중을 거스르는 행동에는 반대한다.
칸트에게 도덕은 결과가 아닌 원칙의 문제라는 점을 기억하자. 당신은 행동(이 경우는 진실 말하기의) 결과를 조절할 수 없다. 결과는 우연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친구는 아마도 살인자가 쫓아온다는 두려움에 이미 뒷문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칸트는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는 살인자가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다거나 거짓이 살인자에게 해가 되어서가 아니다. 거짓은 종류를 막론하고 진실이라는 원천을 오염시킨다.
우선 칸트는 공리주의를 개인 도덕성의 기초만이 아니라 법의 기초로서도 거부한다 칸트가 보기에, 공정한 헌법이라면 개인의 자유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공리는 기본권 결정에"결코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경험적 목적에 관해, 그리고 행복의 구성요소에 관해 저마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공리는 정의와 권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 그럴까? 공리를 권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행복에 관한 여러 견해 가운데 사회가 어느 하나를 지정해야 한다. 특정한 행복을(이를테면 다수의 행복을) 헌법의 기초로 삼는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할 개인의 권리가 무시된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이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듯이, 정의의 원칙도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헌법에 동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헌법이 지금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6강. 평등옹호
《정의론》이라는 책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일시적으로나마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한다고 상상하자. 나의 계층과 성별, 인종과 민족,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신념도 모른다. 남보다.
무엇이 유리하고 무엇이 불리한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내가 건강한지 허약한지 , 고등교육을 받았는지 고등학교를 중퇴했는지 , 든든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문제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협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
우리는 거래 공정성에 곧잘 회의를 품는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거래로 이어질 개연성에 맞닥뜨린다. 이를테면 어느 한쪽이 협상을 잘한다든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든가, 교환 대상의 가치를 더 잘 안다든가 하는 경우다.
계약의 도덕적 한계 두가지를 잘 보여준다. 첫째, 동의했다고 해서 그 합의가 공정하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런 계약은 상호 이익은커녕 호혜라는 이상을 조롱할 뿐이다.
실제 삶에서는 사람마다 처한 위치가 다르다. 따라서 협상력과 지식에서 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경우 동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실제 계약이 도덕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항상 물어야 옳다.
롤스가 옳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니까 정의를 고민하는 방법은 무지의 장막 뒤에서 즉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원칙을 선택할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원칙이 나오겠는가? 롤스에 따르면, 우리는 공리주의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존중받고 싶어 할 것이다. 만약 민족적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 집단에 속한다면, 억압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억압이 다수에게 쾌락을 줄지라도 그러하다.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실제 삶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종교 박해나 인종차별의 희생자가 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 공리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시민이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을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할 것이다. 더불어 이 원칙이 만인의 행복을극대화하려는노력보다우선시되어야한다고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자고 우리의 기본 권리와 자유를 희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원초적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정말로 차등원칙을 선택하겠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도박을 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이 높은 지위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대단히 불평등한 사회를 선택하지는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수 있는가? 더러는 자기가 왕이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땅 한 조각 없는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봉건사회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롤스가 보기에, 이런 제도는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을 분배한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다.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농노로 태어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권리와 권력을 갖는다 그러나 타고난 환경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삶의 전망이 이런 임의의 현실에 좌우된다면 부당한일이다.
법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노력과 경쟁을 허용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회가 전혀 균등하지 않은 방식으로 배분될 수도 있다. 가족의 도움을 받고 교육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 유리하다. 모든 사람에게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면 그 경기는 공정하다고 보기 힘들다. 기회 균등이 공식적으로 보장되는 자유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분배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 체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당함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한 임의의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능력 위주 사회가 사회적 우연을 완전히 제거한다한들,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부와 소득의 분배가 결정되는 상황은 여전히 허용된다."
롤스의 말이 옳다면, 교육 기회가 균등한 사회에서도 자유시장은 소득과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지 못한다 이유는 이렇다. "분배되는 몫은타고난운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그 운은 도덕적 관점에서 볼때 임의성을 띤다. 소득과 부의 분배가 역사적 ·사회적 우연으로 결정되어서는안되듯이 타고난 자산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된다."
어떤 주자가 다른 주자에 비해 빠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빠른 주자에게 납덩이 신발이라도 신겨야하는가?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능력 위주 시장사회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뿐이라고 말한다.
롤스가 내놓은 대안은 차등원칙이라 부르는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다. 어떻게? 재능 있는 사람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 돌o}가게 하는 것이다 가장 빠른 주자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리게 하라. 단, 우승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준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운명을 운이 나쁜 탓으로 돌려도 언찮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능력 위주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 대부분이 세속적 성공은 우리의 자격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7강.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본다.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이다. 우선, 학생들 사이에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으면, 출신 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 있을때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무척 바람직하다.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득보다는 해가 많으리라는 주장이다.
원칙적 반박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강의실과 더욱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는 목적이 얼마나 가치 있든 간에, 소수집단우대정책이 그것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실현하든 간에, 입학에서 인종이나 민족을 따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정책은 자기 잘못도 없이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셰릴 홉우드 같은 지원자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칸트식 또는 롤스식 자유주의자들로, 아무리 바람직한 목적이라도 개인의 권리보다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사명이 관련 능력을 정하지, 학생의 능력이 학교의 사명을 정하지 않는다. 대학 입학의 정의에 관한 드워킨의 설명은 소득 분배의 정의에 관한 롤스의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즉 그것은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드워킨의 답은 이렇다. 분리주의 시대에 특정 인종을 배제한 행위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가치 있다는 경멸스러운 사고방식"에 기초한 반면, 소수집단우대정책에는 그러한 편견이 없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단지, 중요한 전문직에서 다양성 증대가 중요해지다 보니,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라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특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은 흡우드가 열등하다거나 대신 입학한 소수집단 학생들이 홉우드에 비해 우대받을 당연한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강의실과 법조계에서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학교의 교육 목적에 들어맞을 뿐이다. 더불어 그러한 목적 추구가 입학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실망한 지원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법적으로 항의할 수 없다.
다양성이 공동선에 봉사한다면 그리고 누구도 증오나 경멸로 차별받지 않는다면, 인종별 우대는 어떤 사람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도덕적 자격이라는 롤스의 견해에 따르면,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능력을 기준으로 아파트나 신입생 강의실 자리를 차지할 당연한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능력이 인정받는가는 주택당국이나 대학 당국이 사명을 결정한 뒤에야 정해질 수 있다.
롤스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대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자격이 있다거나 애초부터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장점을 높게 쳐주는 사회에 살게 된 것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행운일 따름이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다.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에는 대학의 존재 목적을 놓고 대립하는 여러 견해가 나타난다. 즉 대학은 어느 정도까지 학문의 우수성을 추구하고, 어느 정도까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해야하며, 이러한 목적들은 어떻게 조회를 이루어야 하는가?
8강. 누가 어떤자격을가졌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영광, 미덕, 그리고 좋은 삶의 본질에 관한 논쟁일 수밖에 없
다고 주장한다.
이름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폴리스라면 선을 장려하는 목적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 연합은 단지 동맹으로 전락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그보다 숭고한 행위인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기 때문에, 최고 공직과 영광은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도덕적 우수성은 쾌락과 고통을 모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구별하여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천박한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데 있다 행복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수있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도덕적 미덕도 마찬가지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키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법의 일차 목표다. 즉 좋은 인격 형성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도덕 교육은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을 기르고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미덕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라 부르는 지식이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 지식과 달리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특정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실천하는 지혜이고 실천은 특정 상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를 "선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
실천적 지혜는 정치적인 면이 내재된 도덕적 가치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시민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할 줄 안다. 심사숙고는 철학적 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특정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단순히 계산에 머물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선을 찾아내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다 권리 할당이란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확인한 뒤에 그것과 관련한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본성을 실현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제 몫을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자격에 맞는 공직과 영광을 주고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이러한 우려에 자극받아 사회 역할은 적합성이 아닌 선택에 따라 할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본성을 판단해 역할을 정해주기보다는 직접 자기 역할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자면 노예제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역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잘못이다. 이를 해결하자면 텔로스와 적합성 윤리를 거부하고, 선택과 합의 윤리를 택해야 한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 해 보인다.
9강. 우리는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뜻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칸트식 자율은 합의보다 더 까다롭다. 내가 도덕법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우연히 생겨난 욕구나 충심에 따라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애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순수 실천 이성을 따르는 사람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
도덕법(칸트)을 따르거나 정의의 원칙(롤스)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칸트와 롤스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자기 목적은 자기가 지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든, 다른 사람에게도동일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중립적 틀의 매력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하고, 무엇이 좋은 삶인지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리를 선에 앞세우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이다. 칸트와 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어떻게 이런 우려를 낳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정의를 사람과 (그들 본성에 맞는) 목적 또는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적합성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보는 성향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수 있어야한다." 매킨타이어가 관찰하기에 모든 체험된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론이 깃들어 있다. 이는 외적 권위가 부여한 고정된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과 예측 불능은 공존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니는 내 기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니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다 나를 특별한 삶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특별함을 인식하게 하고, 다른 여러 요구와 더 넓은 지평에도 눈을 뜨라는 요구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산다는 뜻이다.
칸트와 롤스가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거부한 이유 하나는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좋은 인격을 형성하거나 좋은 삶을 규정하려는 헌법은 사람들에게 타인의 가치를 강요할 위험이 있다. 이런 헌법은 개인을 스스로 목적을 선택할 능력을 지닌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자유에 관한 칸트와 롤스의 이 같은 사고 방식이 옳다면, 이들이 말하는 정의도 옳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된 존재여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여러 목적에 중립적인 권리의 틀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아가 목적에 앞선다면, 그 권리는 분명 선에 앞선다.그렇지 않고, 만약 도덕적 행위자로서 서사적 개념에 더 끌린다면,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선을 고민할 때 우리 정체성의 근거지인 공동제의 선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면, 중립을 갈망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을 수 있다 좋은 삶을 생각해보지 않고 정의를 고민하기란 불가능하거나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10강. 정의와공동선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 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부당함을 바로 잡으려면 주변에서 발견되는 삶에 안주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국가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을 일깨우며 공동체 의식을 호소했다.
중요한 사회적 행위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정부가 이러한 이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가능하지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한 정도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최근 10 ∼20년간 우리는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치적 목적에서는) 그 신념을 모른 척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공적 삶에서 그것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에서 나온 존중은 가짜이기 십상이다. 그런 태도는 도덕적 이견을 회피한다기보다는 억누르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반발이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공개 담론을 줄이고, 이 뉴스에서 저 뉴스로 숨어 다니며 추문이나 자극적인 기사 또는 시답잖은 소식에 매달린다.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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