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니체는 인간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도 이러한 사랑의 투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경우 사랑의 투쟁이란 사람들이 서로 투쟁함으로써 서로를 고양시키고 상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품게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첫 번째 질문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니체는 인간은 짧게 그리고 험난하게 살더라도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장수와 안락한 삶이 아니라 힘의 고양과 증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자기의 성향과 투쟁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극복하려 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곤경을 오히려 그것과의 대결을 통해서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기면서 환영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이 세계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으로 경험합니다. 이에 반해 자그마한 불편에도 짜증을 내고 어떻게든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아름다우면서도 풍요롭게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항상 자신의 안락을 위협할 수 있는 두려운 곳으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의 반대는 비애나 고통이 아니라 내적으로 빈곤해지고 생명력이 쇠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우울증입니다.
두 번째 질문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려져 있었던 저주였다.
니체는 세계에서 고통이 사라질 날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서로 투쟁하고 갈등하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이러한 모습이기에 우리는 정신력이 크게 강화되고 고양될 때만 그 세계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사는 것, 매 순간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일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은 곧 삶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앞으로 섬겨야 할 신은 춤출 줄 아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은 삶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즐기고 긍정하는 신입니다. 아무런 목표나 의미 없이 기쁨 속에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이 신을 니체는 디오니소스라고 부릅니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신은 어떤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세계 자체를 가리킵니다. 니체가 '초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렇게 파괴와 창조,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반복되는 이 세계를 웃으면서 긍정하는 자이고, '춤추는 디오니소스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러한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환희에 차 춤추는 자입니다.
세 번째 질문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운명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자랄 수 있을 것인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운과 저항, 증오, 질투, 불신, 고집, 냉혹, 탐욕, 폭력은 덕의 위대한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덕의 성장을 위해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나약한 천성을 가진 자들을 사멸시키는 독은 강한 자들에게는 강장제이다. 강한 자는 그것을 또한 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운명을 긍정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세계는 비록 우리에게 가혹한 시련을 가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도록 돕는 친구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계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사랑합니다. 니체는 이렇게 세계에 감사하고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세계와의 분열과 대립을 넘어선 상태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네 번째 질문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서로 힘을 겨루는 세계이고, 니체는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투쟁이 '사랑의 투쟁'이란 형태를 띨 경우에만 사람들은 서로를 존경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도 있습니다.이런 식으로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상대방을 증오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힘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마도 니체가 말하는 네 가지 미덕을 갖춘 이들이겠지요.
네 가지 훌륭한 태도 - 우리 자신과 친구에게는 정직하게, 적에게는 용감하게, 피정복자에게는 관대하고, 그리고 언제나 예의 바르게,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네 가지 주요한 미덕들이다.
니체가 제일 혐오했던 악덕은 원한이었습니다.
투쟁과 경쟁은 불가피하고, 그것이 불가피한 이상 어떤 형태의 투쟁과 경쟁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발전시켜나가자고 이야기합니다.
다섯 번째 질문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만일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는 바울을 증오와 원한에 사로잡힌 인간이라고 보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가장 저열한 감정은 원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원한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미워하는 인간들을 헐뜯고 그들의 명예나 지위를 손상시키는 것을 니체는 솔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태도라고 여기며 배격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은 선한데 상대방은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나 사회 혹은 조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훌륭하고 잘난 내가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무너에 자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남들이 불행하기만을 바랍니다.
예수의 정신과 불교의 정신은 동일한 생리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면적인 평화로 도피해 들어가려는 정신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종교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인간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니체는 종교적 성인들처럼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집단들이 서로 힘을 겨루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리는 것은 사실 자멸을 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여러 집단과 개인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심지어 '생은 근본적으로 정복과 착취를 자신의 본질로 갖는다'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는 예수와 부처가 내세우는 사해동포주의적인 가치는 인간들을 무기력한 수동성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세계를 피안과 차안으로 나누고 차안을 고해 세상이나 눈물의 골짜기로 보면서 폄하하는 반면 피안을 어떠한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보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니체는 쇠퇴하고 있는 생명력의 징후라고 보았습니다.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이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쇠퇴한 자들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이 세계를 가상으로 보고 다른 세계를 참된 것으로 보면서 이 세상에 복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와 과감히 부딪힐 수 있는가? 이것이 나에게는 갈수록 더 본래적인 가치 기준이 되었다. 오류(이상에 대한 믿음)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의 모든 성과와 전진은 용기로부터, 자신에 대한 가혹함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결벽으로부터 비롯된다.
니체는 인간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현실의 인간은 강인한 의지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을 성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에게 소망할 때의 인간은 지극히 초라해져서,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여기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해줄 것을 간구합니다. 이 점에서 니체는 소망하고 있는 인간보다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유성에 살고 있는 온갖 주민들 가운데서도 내게는 수목들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확실히 가장 완벽한 균형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낳아준 대지 속으로 더욱 깊이깊이 빠져 들어가는 저들의 뿌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끊임없이 위를 향해 뻗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질문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가 신념을 만든다.
정신의 강함, 정신의 힘과 정신의 넘치는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서 입증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그리고 자기 뒤에- 오백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하는 정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신앙을 가진 인간, 모든 종류의 '믿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인간이며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정립할 수 없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목적을 정립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신앙인'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단이 될 수 있을뿐이고 사용되어야 하며, 자기를 사용하고 버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의 본능은 자기소멸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를 부여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자기를 소멸시키도록 설득한다. 확신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게 만든다.
광신자들은 근사해 보인다. 인류는 (이성적인) 근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몸짓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니체는 특정 종교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든 어떤 확신에 독단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 일종의 자기소외이고, 심지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태도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수많은 확신들에 대해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면서 그것들을 인간의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삼을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확신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오히려 우리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대한 양심을 갖는 것이 자기 듯에 달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성실하다 보면 그는 즉각 파멸하게 된다.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불안을 느끼기 대문에 어떤 이념에 의지하여 그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은 진리 대신 삶의 위안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를 희생하여 삶의 위로와 살아갈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떠한 확신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진리를 찾는 것은 자신에게서 삶의 위로와 살아갈 힘을 박탈할 것이기에 그는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정신이 될 경우에만 인간은 어떤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다양한 이념들을 자기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 능력을 믿는,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질문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니체는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활동은 단순히 물리화학적인 작용, 또는 생존이나 종족보존에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는 욕망에 따라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그때마다의 힘의 상태에 따라 사물과 세계를 달리 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약한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빈약하고 추하게 보는 반면에, 힘으로 충만한 건강한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봅니다.
인간은 사물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지만 사실 그 기쁨은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물을 완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자신의 충일한 힘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술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즐기는 것은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예술가는 될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가란 매 순간 도취라는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생을 긍정할 수 있는 길을 궁극적으로 예술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 이전에 우리 각자가 예술가적인 정신 상태로 삶을 사는 데서 찾습니다.
여덟 번째 질문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아홉 번째 질문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권태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신호다.
정답게 들어 살면 탄력을 잃기가 쉽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습관의 마비작용에서 벗어나리라.
열 번째 질문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니체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하나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이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을 일정한 방향으로 길러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독이란 단순히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을 때에도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는 신체를 엄격하게 단련하고 훈육해야 우리의 영혼이 강해지고 힘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보려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반응을 자제하면서 결정을 유예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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