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
선한 자는 달변이 아니고
달변인 자는 선하지 않다.
참 아는 자는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자는 참 알지 못한다.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지 않나니,
남을 위해 내놓지만
그럴수록 더 풍족해지고,
남을 위해 베풀지만
그럴수록 더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만 할 뿐 해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남을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
가. 무위의 왕국
나날의 삶에서 항상 깨어있어라. 그래야 '무위'를 유지할 수 있다. 깨어있지 못하면 그대는 그 순간 무위에서 멀어진다. 무위에서 멀어지면 에고의 집착과 탐욕이 일어나고, 에고의 집착과 탐욕이 일어나면 그대는 다시금 유위와 작위의 혼미 속으로 빠져든다. 무위는 단순한 행위의 양식이 아니다. 그것은 전 존재가 결부되어 있다. 그대 내면에 조금이라도 망상과 무의식의 찌꺼기들이 남아 그대를 잡아당기면 그대는 무위를 유지할 수 없다. 노자의 무위란 무의식의 투사(投射)가 없고 항상 깨어있는 존재의 순수영역이다. 다른 종교 · 다른 철학이 권하는 하늘의 왕국에 가면 달디단 설탕과 포도당들이 가득하겠지만,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왕국에는 그런 것이 한 개도 없다. 아니, 그런 것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어리석은지를 아는 것, 그것이 무위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걸음이다.
나. 노자의 총평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
선한 자는 달변이 아니고
달변인 자는 선하지 않다.
참 아는 자는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자는 참 알지 못한다.
노자가 자신의 '도덕경'을 마무리 하면서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결론이요, 고별사이다. 노자는 그동안 81개의 장에 걸쳐 무위자연의 도에 대해 다방면으로 설명해왔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그동안 자신이 행해왔던 설법에 대해 총평을 내리고 있다. 지금껏 자기가 말해왔던 것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즉, 그 말들은 아름답지도 않고, 달변이나 능변도 되지 못하고, 박학다식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자는 아름다운 말을 추구하고, 청산유수 같은 달변을 추구하고, 박학다식을 추구하는 것은 무위자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노자에 의하면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 양약이 입에 쓴 것처럼, 진실한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말, 달콤한 말, 설탕이 듬뿍 발라진 말들이 어디 없나하고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자기 입맛에 맞는 달짝지근한 말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 그것을 진리의 말로 덮석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무의식에서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가 옆에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인간의 허약한 본성이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것이며, 거기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며, 덮어놓고 그런 말들을 믿음으로써 한세상 편히 좀 살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국 중독이며 플라시보일 뿐이다.
아름다운 말, 달콤한 말, 설탕이 듬뿍 발라진 말들을 가까이 하면 그 순간에는 위안과 위로가 될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우주의 참 모습으로부터 멀어져간다. 우리 인간은 이미 잘못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의해 충분히 중독되어 있고 세뇌되어 있다. 잘못된 철학과 종교들이 2,000년 가까이 사람들 머릿속에 유위와 작위를 집어넣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 세뇌되어 사물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천지자연의 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아름다운 말 · 달콤한 말을 조심하라. 그대에게 가장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한 말을 조심하라. 거기에 중독되면 정신의 당뇨가 온다.
또, 노자에 의하면 선한 자는 달변이나 능변이 아니다. 진실로 훌륭한 사람은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는 자는 대체로 위험 인물이다. 사기꾼치고 말 못하는 자 없다. 이것은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일이다. 사기꾼의 '사(詐)'자가 벌써 말씀 '언(言)'변 아닌가. 히틀러가 얼마나 달변이었으며, 이 시대의 선지자란 자들이 도 얼마나 달변인가. 달변가와 능변가들을 조심하라. 정치와 종교가 그런 자들에 의해 절단난다.
또, 노자는 참 아는 자는 박식하지 않다고 말한다. 원래 박학다식을 추구하는 자 치고 깊이 있는 자 없다. 도를 체득한다는 것과 관념적인 지식에 종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노자는 그래서 도(道)와 학(學)을 엄격히 구별한다. 학(學)은 하루 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道)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이다. 도를 체득한 자는 지엽말단적인 지식을 이것 저것 자꾸 쌓아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들을 몸에서 덜어내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덜어내고 덜어내서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무위(無爲)'이다.
다. 독점하지 마라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지 않나니,
남을 위해 내놓지만
그럴수록 더 풍족해지고,
남을 위해 베풀지만
그럴수록 더 많아진다.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성인은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자기를 위해 쌓아두거나 독점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무엇이 됐든 다 남을 위해 내 놓는다. 그런데도 자기 것이 날로 늘어난다. 있는 것은 무엇이 됐든 모두 다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푼다. 그런데도 자기 것이 날로 더 풍부해진다. 재물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정신적인 것들을 끝까지 혼자 독점하고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노자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다. 노자는 자기가 체득한 진리의 내용을 숨김없이 모두 다 털어놓았다. 천지자연의 도는 골방에서 혼자 손에 쥐고 있으면 점점 쪼그라들지만, 넓은 하늘 아래 남을 위해 내놓으면 더욱 풍족해지고 커진다. 그렇게 되면 어떤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 또 깨우치게 되고, 깨우친 그 사람이 또 내놓으면 더욱 더 커지면서 세상은 점점 어두운 데서 밝은 곳으로, 혼란에서부터 질서로, 미망에서부터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라. 불해(不害)와 부쟁(不爭)
하늘의 도는
이롭게만 할 뿐 해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남을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최후의 결론이다. 노자는 자기가 깨달은 천지자연의 도 전부를 다 털어놓았다. 이 진리는 세상에 이익을 줄 뿐 결코 해를 끼치는 일이 없다. 요컨대, '불해(不害)'이다. 또, 이 진리를 남을 위하고 도와줄 뿐 결코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다. 요컨대, '부쟁(不爭)'이다. 왜 노자는 '불해(不害)'와 '부쟁(不爭)' 두 가지를 자신의 저서 최후의 결론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것은 노자의 시대에도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해를 끼치고 남들과 다투기 좋아하는 이상한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문장은 노자가 우리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런 무리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불해(不害)'와 '부쟁(不爭)' 이 두 가지는 노자 '무위자연'의 도가 갖는 가장 위대한 두 가지 특징이다. 세상에 해를 끼치고 남들과 다투기 좋아하는 것은 결코 '무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천지자연의 도에서 한참 멀어진 유위이며 작위이다. 유위와 작위를 행하면서 하늘의 도를 운운하지 마라. 그런 일에 도의 이름을 걸지 말고, 진리의 이름을 걸지 마라.
노자의 말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그러나 결코 맹탕이 아니다. 한없이 유연해 보이는 한 겹 외형을 걷어내면 그 속에서 문득 마주치게 되는 것은 냉철하게 살아 있는 시대에 관한 비판정신이다. 아마 이 점이 통상의 다른 종교 경전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노자 '도덕경'의 특질일 것이며, 2,500년 이상 꾸준히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변함없이 주목받아 오는 이유일 것이다.
노자 '도덕경'의 마지막 문구는 '위이부쟁(爲而不爭 : 남을 위할 뿐 다투지 않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선가 '부쟁(不爭)'에 마주친 적이 있다. 바로 제8장 물(水)에 대한 언급을 토어해서이다. 즉, 노자는 저서 마지막 문장에서 '부쟁'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물인 물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노자는 정녕 싸우지 않는 물의 덕을 사모했던 사람임을 알겠다.
마지막으로 제8장으로 돌아가 물의 덕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며 노자 '도덕경' 전81장의 해석을 여기서 마칠까 한다.
최상의 덕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중략···)
저 오직 다투지 않으니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EPILOGUE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식은 전달이 가능하지만, 지혜는 전달이 불가능하다. 지식은 선생이 제자 손에 쥐어줄 수 있지만 지혜는 각자가 깨우쳐야만 한다. 지식은 논리를 따라가면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논리를 따라 간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어느 순간에 예기치 않은 도약을 감해하기 때문에 논리가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것이 지혜와 지식의 차이이다. 우리가 노자와 같은 대현인의 책을 대할 때는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노자는 지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주의 큰 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큰 도에 우리의 작은 문제를 비춰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길을 찾고, 삶의 좌표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노자의 도에서 배우는 것들이다. 자잘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좌표를 보여주는 책, 그것을 일러 경전(經典)이라 한다. 제자백가의 많고 많은 책 중에 경전이란 의미의 '경(經)'자가 붙은 것은 노자의 '도덕경'뿐이다. 유가의 서에도, 묵가의 서에도, 법가나 병가의 거 어느 것에도 '경'자가 붙어있지 않다.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제자백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학문을 도(道)라고 불렀지만, 실은 따지고 보면 누구의 것은 박애이고, 누구의 것은 예절이며, 누구의 것은 법이며, 누구의 것은 전술 전략일 뿐 진정으로 천지자연의 도라고 부를만한 것은 노자의 도뿐이었기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후일 장자가 이를 두고 '천하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그것을 스스로 도라고 하니 슬픈 일이로다!(장자, 천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노자의 도는 크고 광대한다. 한편 노자 '도덕경'은 불과 81편의 시를 담고 있는 작은 소품으로서 작고 간결하다. 즉, 크고 광대한 도가 작고 간결한 것 속에 들어있다. 어떤 형태로 들어있는가? 노자의 말 그래도 '불언지교(不言之敎)'의 형태로 들어있다. 그러므로 노자를 공부할 때 우리는 언어에 얽매이면 안된다. 노자의 언어는 다만 광대무변한 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손가락을 붙들면 안 된다. 노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손가락 너머에 있다. 이것이 '불언지교'이다. 요컨대, 진리는 말하여질 수 없다. 이 상황을 노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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