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맺힌 원한은 뒤에 화해하더라도
반드시 응어리가 남게 되나니,
이것을 어찌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빚 받을 것이 있어도
사람을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다.
속담에 덕이 있는 이는
어음으로 결제하고,
덕이 없는 이는
현물을 징수한다고 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이 친함이 없나니,
항상 선한 이와 함께 할 따름이다.
가. 원한
노자는 그동안 짧지만 심오한 경구들을 툭툭던지며,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도 하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때로는 어떤 것을 권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것을 금하기도 했다. 노자가 우리에게 금했던 것들은 주로 무엇이었는가? 노자는 우선 우리에게 가득 채우려 하는 마음의 탐욕을 금했고, 남 앞에서 잘난 체하는 교만을 금했으며, 또 행동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는 병을 피하라고 일렀다. 그 외에도 노자는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여러 악재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말들을 '도덕경' 여기 저기에 많이 남겨 놓았다. 대체로 그런 말들은 우리에게 신중을 기하게 하고, 허영과 경망, 부실과 천박 따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여러가지 것들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자신의 책을 끝내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생을 살면서 남에게 원한 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한, 이것이 노자의 마지막 테마 중의 하나이다.
나. 빚 받을 때 조심
깊이 맺힌 원한은 뒤에 화해하더라도
반드시 응어리가 남게 되나니,
이것을 어찌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빚 받을 것이 있어도
사람을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다.
남에게 원한 살 일을 하지마라. 한 번 원한이 깊이 맺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화해를 시킨다 해도 마음 한켠에 반드시 응어리가 남게 되는 법이다. 그래가지고서야 어찌 그것을 잘 처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처음부터 원한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너한 사는 일과 관련하여 노자가 빚 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노자는 빚 받을 것이 있어도 사람을 심하게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노자는 과연 빋 받을 입장이었을까 빚 갚을 입장이었을까? 나는 자못 그 대목이 궁금해진다. 인간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2,500년 전에도 빚 받는 문제로 사람을 다그치는 자들이 있었고, 그러다가 원한을 사게 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과 아무 차이가 없다.
다. 야생의 사고
그러나 전체적으로 우습지 않은가? 고상한 무위자연을 이야기했던 노자가 '원한'에 대해 별도의 장을 할애하여 특별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원한은 무위자연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한없이 순수한 무위자연을 설하는 '도덕경'이 마지막에 인간의 가장 밑바닥 감정인 '원한'을 들고 나오는 걸까 - 하는 생각이 누구나 일순 들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자 '도덕경'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나는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국 노자의 무위자연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왔고, 무엇과의 투쟁 속에서 그렇게 성숙한 사상으로 익어간 것인지 새삼 뚜렷이 알 수 있었다. '도덕경'은 홀로 고고히 저 높은 구름 위에 떠 있는 책이 아니며, 노자는 결코 고상한 형이상학을 추구했던 관념철학자가 아니다. 노자는 온갖 유위와 작위가 난무하는 현실의 한가운데 서서 그 모든 어리석음을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마치 기나긴 어둔 밤 끝에 새벽이 오듯이 그 깊은 혼돈의 끝에서 '무위'를 발견해 냈던 것이다.
노자의 무위를 잘못 생각하면 아무 슬픈이나 고통이 없는 존재의 무풍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그런 무풍지대란 화초나 식물을 가꾸는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며, 그런 곳에서는 배부른 무위도식이 생성돼 나올 뿐 무위같은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가 없다.
무위는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 분노와 좌절, 고통과 번민이 한덩어리로 뒤섞여 요동치는 현실 그 자체 속에서 태어난 사상이며, 인간사회의 여러 모순들과의 투쟁 속에서 원숙해진 사상이다. 요컨대, 무위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현실의 용광로 속에서 제련되어 나온 정신의 순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위를 이해함에 있어 그것을 마치 인생의 동력을 상실한 어느 무기력한 철학자의 비행위 혹은 무행위에 대한 예찬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위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노자의 무위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 탄생한 야생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적나라한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들어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는 '무위'라는 사상은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위'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유위와 작위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펼쳐지며, 어떠허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깊이 깨달은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위대한 통찰이라 하겠다.
마. 천도무친
하늘의 도는 사사로이 친함이 없나니,
항상 선한 이와 함께 할 따름이다.
우리 자신은 남한테 온후하고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면서도 하늘로부터는 필히 온후하고 너그럽게 대접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 정도를 넘어 자기만은 하늘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들은 은혜니 은총이니 기적이니 하는 용어를 남발하면서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며 부지런한 입술을 놀려 기도를 하며 하늘의 도와 어떻게든 친해보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늘의 도는 어떤 누구와도 사사로이 친함이 없다. 하늘의 도가 누구와도 사사로이 친함이 없다는 말이 서운한가? 그러나 누구와도 사사로이 친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의 도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누구와 사사로이 친하게 되면 그 순간 하늘의 도는 무너진다. 그것은 더 이상 하늘의 도가 아니다. 그것은 무도요, 비도이다.
노자 '도덕경'에는 좋은 말들이 많이 있지만, 81개 장 어디를 펼쳐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 말들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은혜니 은총이니 은사니 하는 부류의 말들과, 기적이니 이적이니 신비니 하는 부류의 말들이다. 노자는 왜 이렇게 멋지고 환상적이며 오묘한 말들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노자는 바보 아닐까? 노자는 왜 돈 드는 일도 아닌데 남들이 원하는 말,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그런 말만 잘했더라면 노자의 도도 세상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노자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사실 노자의 정신의 경향과는 정반대되는 것들이다. 노자에 따르면 그런 말과 용어들이야말로 하늘의 도와 사사로이 친하려 하는 수작이다. 사람들이 광대한 천지자연의 도를 버려두고 자꾸 그런 사사로운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한 것이다. '도덕경' 전체를 통해 대현인 노자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우리 마음 안에서 그러한 이기적 욕구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우주가 자신을 향해 돌고 있다는 어린애 같은 유치한 환상을 버려라. 은혜니 은총이니, 기적이니 이적이니 하는 관념과 가장 반대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자의 '무위'이다.
노자의 무위란 이 우주에 대한 최고도의 긍정이요 찬사이다. 노자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저 심오한 '무위자연'의 관념을 이야기했을 때, 정확히 그가 했던 말의 의미는 <이 우주가 어떤 흠결도 없는 완벽한 질서 속에 있음을 찬미>하려던 것이었다. 이 우주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이 우주는 유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우주의 완전함에 대한 절대적 신뢰 - 그것이 바로 무위이다. 은혜와 은총이 멀리 있다고 생각치 마라. 이 우주는 매순간 은혜와 은총 속에 있다. 봄이 되어 냇물이 졸졸 흐르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것, 이것이 은혜이고 은총 아니면 무엇이냐? 여름이 되어 천지 만물이 저절로 무성해지는 것, 이것이 기적이고 이저거이 아니면 무엇이냐? 가을이 되어 오곡백과가 저절로 무르익고,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이 다시근 뿌리로 돌아가 깊이 잠들어 휴식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천지자연의 도가 말없이 베풀어주는 참된 은혜와 은총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고맙다. 빛나는 별이 고맙고, 무한히 펼쳐진 하늘이 고맙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고맙고, 말없이 흐르는 물이 고맙고, 평평한 땅이 고맙고, 활활 타오르는 겨울밤의 장작불이 고맙다.
요컨대, 우리의 삶 전체가 우주와 연결돼 있다. 우리의 일거수 이투족이 모두 우주의 자비로부터 힘입은 것이고, 우리의 호흡 하나하나가 모두 은혜와 은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자각할 일이다.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한 마디가 포괄하는 정신의 범위는 실로 심원하고 광대하다. 우리가 무위의 참뜻을 깊이 헤아려갈수록 가려져 있는 우주의 참모습이 점점드러나는 듯하다. 그렇게 우리가 일생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무위를 배워가다보면 마침내 어느 날 우리 몸에서 유위와 작위가 뱀 허물 벗듯 스르르 사라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바. 선한 이
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이란 자기를 잊어버리고 천지자연의 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관념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버리며 우주의 흐름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근거에서 자기라는 실체를 찾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이 우주와 연결돼 있음을 알고, 자기를 비운다. 그리고 그 비움을 통하여 항상 하늘의 도가 그와 함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늘의 도가 그의 편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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