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광대하지만 어리석은 것 같다고 한다.
허나, 오직 광대하기 때문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다.
만약 똑똑하다면 오래 전에 자잘하게 되고 말았으리라.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잘 간직하고 있나니,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자비로 인해 용감해지고
검소함으로 인해 널리 베풀 수 있고
천하의 앞에 서지 않음으로 인해 온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함을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 서는 태도를 버린 채 앞서려고만 하니,
그러면 죽을 것이다.

무릇 자비란
그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게 되고
그것으로 지키면 곧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나라를 세우게 하면
너는 자비로 그 담을 세우라.


 

가. 큰 것과 자잘한 것

천하가 모두 이르기를
나의 도는 광대하지만 어리석은 것 같다고 한다.
허나, 오직 광대하기 때문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다.
만약 똑똑하다면 오래 전에 자잘하게 되고 말았으리라.

진실로 위대한 것은 도리어 위대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역설은 '도덕경' 전편에 걸쳐 나타나는 노자의 탄식이다. 세상 사람들은 당장에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원하지 너무 거창하고 심오한 도(道) 같은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하루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데, 누가 한가하게 진리니 도(道)니 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노자의 도에는 사탕발림이 없어도 너무 없다. 쓰디쓴 도를 민중의 입에 넣으려면 거기에 두툼하게 설탕을 한꺼풀 입혀야 되는데, 노자는 그런 일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다. 노자는 누가 알아듣던 말던 오직 절대적 차원에서 도(道)를 설파할 뿐이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제5장에서 말했던 '천지불인(天地不仁 : 천지는 아무도 편애하지 않는다)사상 같은 것이다. 민중들은 오늘도 도탄에 빠져 허덕이며, 하늘이 자기들의 영원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하고, 금식 기도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줘야지, '하늘은 아무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이런 점을 보면 확실히 노자는 어리석은 게 맞다. 그의 도는 광대하지만 어리석은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노자는 그 말 끝에 이상한 반론을 제기한다. '허나, 오직 광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진실로 위대한 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 결코 위대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 욕구, 자기 필요에 맞는 걸 찾아다닌 것이며, 그걸 성취한 자가 똑똑한 것이지 다른 것이 없다. 순간의 관점에서 자기 몫을 잘 챙기는 똑똑함 · 현명함이 필요한 것이지 영원의 관점에서 천지 만물을 다 헤아리는 저 광대함 · 심원함 따위에 세상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노자가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노자는 전혀 그 어리석음을 버릴 생각이 없다. 왜냐? "만약 똑똑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자잘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삼보(三寶)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잘 간직하고 있나니,
첫째는 자비요,
둘째는 검소함이요,
셋째는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삼보는 '자비', '검소함',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보물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것으로 '자비(慈)'를 꼽았다. 나는 여기서 노자가 '인(仁)'이라고 하지 않고 '자(慈)'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노자는 '인(仁)'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이라는 말에서는 아무래도 인간중심적인 냄새가 나며, 문명의 냄새가 난다. '인'이라는 개념은 유가(儒家)에서 사용하는 용례에서 보는 것처럼 항상 '인의예지'라는 세트 개념으로 동장하는데, 이것들은 전형적으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 요소들이지 문명 이전의 원초적이며 순수한 상태를 지칭하는 것들이 아니다. 어질 '인(仁)'자 자체가 사람 인(人)자와 두 이(二)자로 이루어진 글자 아닌가. 즉, 어질 '인'자는 인간사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둘째는 검소함(儉)인데, 검소함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유사한 개념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이것은 넓게 보면 제29장에서 노자가 말한, 인간이 피해야할 심(甚 : 과도함) · 사(奢 : 탐닉) · 태(泰 : 교만) 삼악덕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노자의 '검(儉)'이란 것은 굉장히 폭넓은 개념이다. 이것을 좁게 해석하면 경제적으로 사치하지 않는 것이지만, 넓게 해석하면 마음과 행동과 태도 등 인생의 전 영역에서 거품을 빼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천하의 앞에 서지 않는 것(不敢爲天下先 불감위천하선)인데, 이것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노자는 결코 이 말을 겁쟁이나 소심한 자들을 두둔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마차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것은 뒤에 처진 힘없는 마차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강력한 힘을 마차가 지니고 있지만, 앞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뒤에서 잘 제어해주는 최고도의 인내심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힘을 지녔으면서도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겸손이고 겸허함이다.

 

다. 자비로 그 담을 세우라

지금 사람들은 자비를 버리고도 또한 용감하려 하고
검소함을 버리고도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 서는 태도를 버린 채 앞서려고만 하니,
그러면 죽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모순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어떤 때 보면 후하고 관대한데, 또 어떤 때 보면 굉장히 짠돌이에 구두쇠인 사람들의 행동 양식은 주변 사람들을 간혹 혼란케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으로 봤을 때만 모순적이지, 깊숙이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은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다. 그는 무의미한 데다는 10원짜리 하나 쓰려하지 않는다. 만약 운없이 그때 당신이 그 사람 옆에 있었더라면 구두쇠 같은 행동에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엄한 데다가 쓰지 않고 잘 모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널리 베풀수 있는 것이다. 사치는 사치대로 부리면서 또 주변에 널리 베풀고 싶어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것은 위선의 극치이다.

천하의 앞에 설 때와 뒤에 설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 앞에 서야할 때 뒤에 숨어있는 자는 비겁한 자이고 한심한 자이다. 그런 자에게는 세상이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 서야할 때 앞으로 튀어 나오는 자는 뻔뻔한 자이거나 상황파악이 안 되는 자이다. 노자는 제9장에서 '공 이루었으면 몸 물러가는 것, 그것이 하늘의 도이다'라고 말했다. 공이루었다고 몸 물러나기 싫어하던 사람들 중에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무릇 자비란
그것으로 싸우면 곧 이기게 되고
그것으로 지키면 곧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나라를 세우게 하면
너는 자비로 그 담을 세우라.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성인은 위의 세 가지 것을 보배로 삼아 몸에 잘 간직하고 보존한다. 그 중에서도 노자는 '자비(慈)'를 가장 으뜸으로 쳤다. 이 단락은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불가의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누구도 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모든 것에 대하여 다 이긴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 그는 저 높은 초연한 곳에 있다. 그는 진정한 승리자이다. 자기의 영역, 자기의 나라, 자기의 집을 '철조망'으로 담을 세우고 사는 이 시대에, '자비(慈)'로 담을 세우라는 노자의 말이 참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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