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도를 잘 행했던 이는
백성을 총명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우직하게 만들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다스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요,
지모를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곧 하늘의 법도에 맞는 것이니,
늘 그 법도를 깨닫고 있음을 일러
현묘한 것이라 한다.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여
세속과는 반대로 보이는데,
그런 연후에 결국 대순(大順)에 이른다.
가. 앎(knowledge)
학문에는 인간이 이것 저것 덧붙일 수가 있지만, 도에는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 인간은 학문은 제멋대로 이리 저리로 끌고 다닐 수 있지만, 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인간은 학문을 잡아당겼다 늘였다 할 수 있지만, 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컨대, 인간은 도에 대해서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는 도일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학(學)과 도(道)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 둘을 뒤섞으면 안 된다. 그 둘을 뒤섞는 짓은 파렴치한 짓이며 동시에 위험한 짓이다. 우리가 학문(學)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지식 · 지혜 · 총명 이것들은 언제라도 조작이 가능하며, 왜곡될 수 있고, 때가 탈 수 있다. 한때 세상에 인기 있던 지식이 얼마 안 있어 쓰레기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지식의 시장은 그대를 유혹한다.
허나, 지식은 쓰레기마냥 부풀어 갈 뿐이다.
가만히 우리의 둘레를 살펴보노라면
사랑이 얼마나 우리의 정신을 높여주는가를 알게 된다.그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배우려 한다면
다른 사람의 집 문에 귀를 대고 엿들어보라.
어떤 지식이 분수에 맞는 것인가를 알게 되리니.
올바른 일이 그대 안에 싹터 오르려면
신(神)의 품 안에 올바른 일이 있음을 느껴야하리.-'서동시집', 명상의 서 - 괴테
나. 총명보다는 우직함
그러므로 지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요,
지모를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곧 하늘의 법도에 맞는 것이니,
늘 그 법도를 깨닫고 있음을 일러
현묘한 것이라 한다.
도가의 기본적 삶의 태도는 인지(人知)와 천도(天道)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인지 다하는 곳에 천도 있다', 이것이 도가의 모토이다.
다. 대순(大順)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여
세속과는 반대로 보이는데,
그런 연후에 결국 대순(大順)에 이른다.
현묘한 덕(玄德)은 왜 깊고 아득한가? 그것은, 현묘한 덕이 인지(人知)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천도(天道)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얼른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통념과 상식만으로는 현묘한 덕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속의 가치기준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사물의 이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사물의 이치와는 반대되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묘한 덕은 뭇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없고, 거부당하며, 웃음거리가 된다. 노자가 말하지 않았더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가!' 현묘한 덕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그런 연후에 그것은 결국 천도(天道)에 크게 합치되는 대순(大順)에 이르는 것이다. 대순에 이른다는 것은 이 우주에 대해 어떤 거스름도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내어 맡기는 것이다. 대순(大順)이란 결국 궁극의 수동성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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