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인색함보다는 깊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특별한 경우에는 법을 조금 융통성있게 적용할 때도 있지. 하지만 네 경우에는 법이 엄격히 적용된단다. 그러니 넌 꼭 학교에 다녀야만 해."

"세상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죽은 뒤의 세계를 지나치게 걱정하느라고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한테 일어난 일은 전혀 알 수 없어."

"이웃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아저씨가 살아온 삶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 준 거 말이다."

언젠가 아빠는 내게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스카웃, 단순히 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으로보면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기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문제에 관해 어쩌면 학교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를 위해 한 가지만 약속해주렴.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잭! 어린애가 뭘 묻거든 반드시 그대로 대답해 줘, 지어내지 말고. 애들은 역시 애들이라지만 대답을 회피하는지는 어른들보다도 빨리 알아차리거든. 그리고 대답을 회피하면 애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지."

"욕은 모든 애들이 거쳐야 하는 한 단계야.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애들은 자연히 욕을 쓰지 않게 돼 있어. 하지만 성급한 성질은 그렇지가 않거든. 스카웃은 분별력을 배워야만 해."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그 애가 노력한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거야. 내가 걱정하는 건, 얼마 안 있어 곧 아이들이 몇몇 추악한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 아빠가 내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아셨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아빠가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내가 듣기를 바라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법이란다."

"그들에겐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줘야 해.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겨우 45킬로그램도 안 되는 몸무게로 할머니는 승리하신 거야. 할머니의 생각대로 그 어떤 것,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까. 할머니는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용기 있는 분이셨단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화가 나는 거지.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어. 그들 스스로 배워야 하거든. 그들이 배우고 싶지 않다면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처럼 말하는 수밖에."

라이스 크리스천 : 종교적 이유보다는 물질적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한 신도들. 주로 중국과 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원주민 개종자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라이스>는 쌀을 뜻한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지금은 걱정할 때가 아니니까."

딜이 설명하는 동안, 만약 젬 오빠가 심지어 지금과 다르다면 내 삶이 어떻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빠가 내 존재, 내 도움, 내 충고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으신다면 나는 어떻게해야 할까요. 아빠는 내가 없다면 아마 단 하루도 살아가실 수 없을 겁니다. 캘퍼니아 아줌마도 내가 없다면 그럴 거고요. 그들에겐 모두 내가 필요했습니다.

어떤 위기가 있을 때마다 아빠는 '모빌 레지스터'나 '버밍햄 뉴스' 또는 '먼트가머리 애드버타이저'를 읽으면서 조용히 그 위기를 음미하셨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습니다.

"그걸 보면 뭔가 알 수 있어. 들짐승 같은 패거리들도 인간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걸. 흠, 어쩌면 우리에겐 어린이 경찰대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어젯밤 너희들은 비록 잠깐이었지만 월터 커닝햄 아저씨를 아빠의 입장에 서게 만들었던 거야. 그걸로 충분하다."

절대로,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 심문을 할 때는 무슨 답이 돌아올지 모르는 질문을 증인에게 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가 이유식을 먹을 때부터 터득한 원칙이었지요. 만약 그랬다가는 원하지 않는 답을 얻게 되며, 그 답 때문에 사건을 모두 망쳐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든 그녀응 <아가씨>나 <메이엘라 양>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일상적인 예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마 그런 예의를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그녀의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곧 그 답을 알게 됐습니다.

아빠가 친구가 있냐고 물으셨을 때,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놀려 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말이야, 딜, 결국 그는 흑인이잖아."
"난 그런 거 손톱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너희들은 낯가죽이 두껍지 않아. 그래서 구역질이 나는 거지?"

레이먼드 아저씨는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껄걸 웃으셨고, 나는 분별 있는 질문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습니다.

"난 그들에게 구실을 주려는 거야. 사람들은 구실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지."

그러나 언제나 너무 편안하고 바로 친구로 편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좋은 친구들'에 관해서는, 그들에게 처음부터 오해할 수 있는 놀이 공간과 놀이터를 허용하는 것이 좋다 : - 그렇게하면 우리는 여전히 웃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좋은 친구들을 완전히 없앨 수도 있다. - 그래서 또한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내가 원해서 지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어. 전에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거야. 그럴 때면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

"아직은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갈 때 아빠가 오빠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우리는 이것이 모디 아줌마가 자신에 관한 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말씀하시는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줌마는 우리를 지켜보시며 부엌 의자에 조용히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젬, 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마라. 세상만사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진 않단다."

 "웃는 것 말고는 사람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총을 갖고 있는 건 누군가 자기를 쏘도록 유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

"밥 유얼을 무서워할 것 하나 없다. 그날 아침 그 사람은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써버렸으니까."

"톰의 배심원들은 평범한 삶을 사는 이성적인 인간 열두 명으로 구성되었어. 하지만 넌 그들과 이성 사이에 뭔가 끼어드는 것을 본 거야. 그날 밤 감옥 앞에서 네가 본 것도 이와 똑같은 거였지. 그 패거리가 발길을 돌렸을 때 그들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냐. 그들은 우리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되돌아 간 것뿐이지.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아무리 애써도 항상 공정할 수만은 없는 거야."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원한을 배 심원석까지 갖고 가기 마련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다, 자업자득이란다. 우리는 보통 우리 수준에 맞는 배심원을 갖기 마련이거든."

"누구나 다 배워서 아는거야. 날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월터도 자기 나름대로는 똑똑한 거야. 집에 남아서 아빠 일을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종종 뒤처질 뿐이지. 그 애한테 잘못된 것은 없어.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마침내 오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 있다면, 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까? 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지? 스카웃, 이제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부 래들리가 지금까지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아저씨가 집 안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아빠는 자유인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톰 로빈슨의 목숨을 건져 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의 법정에서는 아빠도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톰은 메이엘라 유얼이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는 순간 바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박해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거란다."

아빠는 오빠가 무언가 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충분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얼마동안 그 무엇을 기억해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야 오빠는 그 무엇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잇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오빠는 다시 옛날처럼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헥, 이 문제를 조용히 무마시킨다면 내가 그 애를 길러 온 방식을 간단하게 부정하는 것이 돼. 때론 부모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 애들한테 있는 것이라곤 내가 전부네. 젬은 다른 누군가를 쳐다보기 전에 나를 먼저 쳐다본다네. 나도 그 애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도록 살려고 노력해 왔고...... 이런 식으로 뭔가 묵인한다면, 솔직히 말해 난 그 애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그리고 그렇게 마주보지 못하는 날, 나는 그 애를 잃는 것임을 잘 알고 있고. 그 애와 스카웃을 잃고 싶지 않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그 애들뿐이니까."

이웃 사람들은 누가 죽으면 음식을 가져오고, 누가 아프면 꽃을 가져오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일에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져옵니다. 부 아저씨는 우리 이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비누로 깎은 인형, 고장 난 시계와 시곗줄,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동전 두 닢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이렇게 선물을 받으면 이웃 사람들은 답례를 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그 나무에서 얻은 것도 도로 돌려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나는 슬펐습니다.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와 내가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대수를 빼놓고는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게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말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작품 해설 -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먼트가머리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시내버스에 올라 뒷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때 백인 한 사람이 버스에 을라탔고, 운전기사가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는데도 로자는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운전기사는 경찰에 신고했고, 로자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먼트가머리에서는 1년에 걸쳐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마침내 대중교통에서 인종 차별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사건을 계기로 평생 인권 운동가 로 활약한 로자는 <옳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55년에는 오서린 루시라는 여성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터스 컬루사 소재 앨라배마 대학에 등록하려고 하다가 백인의 소동으로 입학을 포기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두 사건보다 20여 년 앞서 1931년에는 스코츠보로 재판 사건으로 앨라배마 주가 미국 전역에 걸쳐 큰 관심을 끌었다. 혹인 청년 아홉 명과 백인 청년두명 그리고 백인 여성 두 명이 테네시 주에서 화물차를 얻어 타고 앨라배마 주로 가고 있었다. 화물차 안에서 흑인 청년과 백인 청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백인 청년들은 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앨라배마에 도착하자마자 흑인 청년은 부랑아로 체포되었고, 백인 경찰의 사주를 받은 백인 여성은 흑인 청년들이 자신들을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무려 20년을 끈 재판에서 흑인 청년 아홉 명은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를 쓰면서 하퍼 리는 이 사건에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하다. 메이엘라 유얼과 톰 로빈슨을 둘러싼 사건은 스코츠보로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유스티티아가 이렇게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특히 앨라배마 같은 남부 주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백인 중심주의가 유난히 심한 이곳에서는 정의의 저울이 늘 백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남부에서는 힘이 곧 정의로 통했다.

스카웃에게 숙녀가 된다는 것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남부 여성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숙녀>란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잘할 줄 안다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스카웃에게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숙녀가 되는 일이다.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에서 나이 어린 주인공 핍을 통하여 <신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다룬다. '앵무새 죽이기'는 스카웃이 <숙녀>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핍과 스카웃은 허구적 남매라고 볼 수 있다.

 

 

'앵무새 죽이기' 번역에 대하여

작가가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을 뿐 작품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따옴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나는 평소 모든 번역은 줄잡아 10년 단뒤로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세월의 풍화 작용을 받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언어는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과 감각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번역가는 <완벽한 번역>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늘 새롭게 다시 번역할 준비를 해야 한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는 <모든 글은 미완성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완성으로 말하자면 번역보다 더 미완성인 글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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