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 도덕경] 제47장
문 밖에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보나니,
그 나아가는 것이 멀면 멀수록
그 아는 것 더욱 더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훤하며,
하지 않아도 이룬다.
가. 객관화의 불가능성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진리가 저 멀고 높은 곳 어디, 인간의 손이 가 닿을 수 없는 한없이 숭고하고 초월적인 곳 어디에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구도의 길에 오른 사람들이 범하는 인식의 오류요 착오이다. 아무도 이 착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처음 진리추구의 길에 오른 초심자들의 경우는 이 착오가 더 심하다.
그렇다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이렇게 심대하게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심리학적인 원인 - 즉, 자신의 현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욕구가 강하면 강할 수록 그에 대한 반발력도 강해지는 법이다. 어느날 문득 자신이 두텁디 두터운 무지의 질곡 속에 갇혀 있다는 슬픈 반성이 과도하게 찾아오면서 이러한 존재의 속박 상태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욕구가 커다란 반발력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결과 자기 존재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는 심리 상태, 이것이 초심자들의 심리 상태이다. '내가 지금 깊은 존재의 어둠 속에 휩싸여 있는데, 그렇다면 나를 구해줄 빛은 나와 정반대되는 곳에 존재하지 않을까?' 초심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붓다는 말했다.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사람,
땅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내가 발이 걸려 넘어진 곳도 땅이지만, 내가 다시 손을 짚고 일어나는 곳도 땅이다. 땅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땅을 떠나서 살 수도 없다. 인식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식의 착오를 일으키는 것도 마음이고, 참된 인식에 도달하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을 탓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을 떠나서는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인간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 무위이성(無爲而成)
존재의 외곽에서 떠들지 말고 과감하게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옛사람들이 말하던 '원시반본(原始反本)'이다. 존재의 중심에 도달하면 거기에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
천지자연의 어머니이며 근원인 도(道)를 인식하라. 도를 인식하면 그대는 안으로부터 심안(心眼)이 열려 자연스레 우주의 흐름을 알게 되고, 나아가 현상세계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굳이 개개의 사물을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으며, 굳이 무언가를 억지로 행하려 하지 않아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아도 알고 (不行而知 : 불행이지)
보지 않아도 훤하며 (不見而名 : 불견이명)
하지 않아도 이룬다 (無爲而成 : 무위이성)
노자는 무위에서 인간존재의 완성을 보았다.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위에서 온다. 유위는 인간을 닮아있고, 무위는 하늘을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