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도덕경

[노자 - 도덕경] 제38장 최상의 덕은 자기를 의식하지 않나니

snugpoooh 2015. 9. 1. 15:35

최상의 덕(德)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나니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것이며,
하급의 덕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나니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德)은 무위이므로
작위하지 않지만,
하급의 덕은 유위이므로
작위하려 한다.
최상의 인(仁)은 유위이지만
작위하지는 않으며,
최상의 의(義)는 유위이면서
작위하려 한다.
최상의 예(禮)는 유위일 뿐만 아니라
응답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대든다.

그러므로 도 잃은 후에 덕(德) 있고,
덕 잃은 후에 인(仁) 있고,
인 잃은 후에 의(義) 있고,
의 잃은 후에 예(禮) 있다.
결국 예란 믿음이 희박해진 것이니 혼란의 시작이오,
앞선 지식이란 도의 헛된 꽃이니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그런 관계로 대장부는
두터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아니하며,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다.




노자에 의하면 우주 천지만물을 존재케 하고 생성화육(生成化育) 시키는 것은 도이다. 그런데 이 도는 말이 없고 무위(無爲)이다. 
그렇다면 덕(德)이란 무엇인가? 덕이란 이러한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했을 때 우리 몸에서 나오는 어떤 정신적 힘을 가리키는 것이다. 


최상의 덕(德)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나니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것이며,
하급의 덕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나니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없는 것이다.

무위의 도(道)에서 무위의 덕(德)이 나온다. 천지자연의 도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듯이, 최상의 덕도 역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신을 내세우는 순간 덕은 사라지고 없다. 남보다 바지런하고 정의감도 투철해 이런저런 공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대체로 결여된 것이 자기 통제력이다. 그들은 가만있으면 그 공이 오래가련만 참지 못하고 꼭 입으로 그 공을 깨고 만다. 당신이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행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는 말아라.


최상의 덕(德)은 무위이므로
작위하지 않지만,
하급의 덕은 유위이므로
작위하려 한다.

그렇다. 하늘은 우리에게 저 귀중한 햇빛을 무료로 주면서도 아무 티를 안 내는데, 우리 인간이란 라이터를 한 번 빌려주고도 인사받으려 한다. 말 못하는 소(牛)는 하루 종일 우리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도 아무 티를 안 내는데, 우리 인간은 허리를 한번 굽히고도 남에게 생색내려 한다.


최상의 인(仁)은 유위이지만
작위하지는 않으며,
최상의 의(義)는 유위이면서
작위하려 한다.
최상의 예(禮)는 유위일 뿐만 아니라
응답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대든다.

의(義)는 '유위'이면서 '작위'하려 한다. 이것이 의(義)의 위험한 면이다. 인(仁)은 유위이긴 하나 작위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은 지나쳐도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의는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仁)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義)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소동파).

예(禮)는 '유위'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응답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대든다.' 노자는 예에 대해 아주 혹평한다. 노자는 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대체로 예를 앞세우는 자들을 보면 위선자들이 대부분이다. 예에서는 어딘가 위조와 날조의 냄새가 난다. 노자처럼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냄새를 남보다 빨리 맡는다. 과도하게 예를 내세우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주변 공기가 답답해진다. 그들은 남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끊임없이 뒤에서 따라다니며 남들의 행동을 제약하려 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예절이란 이름으로 사람의 심리에 은밀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괴테도 이런 말을 했다. "두 개의 평화로운 폭력이 있다. 즉, 법과 예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도 잃은 후에 덕(德) 있고,
덕 잃은 후에 인(仁) 있고,
인 잃은 후에 의(義) 있고,
의 잃은 후에 예(禮) 있다.
결국 예란 믿음이 희박해진 것이니 혼란의 시작이오,
앞선 지식이란 도의 헛된 꽃이니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도에서 덕으로, 덕에서 의로 차츰차츰 순차적으로 하강하여 끝에 가서 예에 이른다. 그러므로 예란 모든 자연스럽고 참된 것이 사라져버린 이후에 남게 된 거대한 위선의 덩어리이다. 그것은 사람들 간의 참된 믿음이 희박해진 결과물이니 '혼란의 시작(亂之首)'인 것이다.

노자는 예(禮)를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과도한 지(知)도 경계했다.

노자에 의하면 '앞을 보는 지식'이란 도의 열매없는 헛된 꽃이니 그것은 어리석음의 시초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두터운 곳과 열매-즉, 도와 덕-에 머무르고, 얄팍한 곳과 꽃-즉, 예와 지-에 머무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