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라고요? 한때는 사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 병은 내 육체에 속한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내 병이고 내 육체지만, 육체와 병이 나인 건 아닙니다. 그 두 가지 모두 극복해야 하는 거죠. 설령 육체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형이상학적으로는 극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안쓰러운 몸뚱아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왜 사는지 알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또한 향후 10년 동안의 인생의 목적과 사명도 있습니다.

진실은 의심과 회의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어린애 같은 소망을 통해 도달되는 게 아닙니다! 신의 손에 모든 걸 맡기겠다는 환자의 소망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유치한 소망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죽지않으려는 소망이자, 우리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영원히 부풀어 있는 젖꼭지일 따름입니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신의 불필요성을 입증했습니다. 비록 다윈 자신은 자기가 내놓은 증거에 따라 진실한 결론을 내릴 용기가 없었다 해도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신을 창조했고 지금은 우리 모두 함께 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보다 더욱 신성한 행위가 있습니까? 누군가는 제 철학적인 작업이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라고 반박하겠지요. 제 입장은 계속해서 바뀌니까요. 그렇지만 화강암처럼 단단한 문장이 하나 있어요. 바로 '너 자신이 돼라'는 겁니다. 그런데 진실 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인간을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있는 환상을 움켜쥐는 것이지요. 그런 선택은 타자를 위한 선택이며, 초자연적인 선택이어서 언제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그건 언제나 인간을 실제보다 작게 만들지요. 난 우리가 실제 이상으로 커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은 죽음과 어떻게 직면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지, 충고를 해줄지, 죽기 전에 말하려고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이야기할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지, 아니면 혼자 있을지, 울지, 죽음에 저항할지, 저주할지, 감사할지를요.

죽음은 각 개인에게 고유한 것이지요.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을 실현해야 합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앗아갈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위안이 아닙니다. 그건 잔인한 겁니다!

순수한 관념의 영역에는 사람을 정화시켜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뼈와 살, 내장과 혈관은 살갗 아래 감춰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불안과 열정은 허영에 둘러싸여 있어 견딜 수 있다. 허영은 영혼의 살갗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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