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오래된 지도를 다시 보다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1.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 제도화된 악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귀하게 생각한 것, 지금까지 내 '전' 생애를 형성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한다고 갑자기 화를 내시는 건가요."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2.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그때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예비 지식인이라 여겼교, 사회에서 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식인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지식인으로서 바람직한 삶은 어떤 모습인지, 자기 인생에서 지식인의 소명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하는 학생이 많았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느냐.

 

 

 

 

3.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역사법칙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내부에서 새로운 계급과 계급투쟁이 발생함으로써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혁명가 마르크스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변화를 보고 싶은 나머지 이론가 마르크스를 망가뜨렸고, 이론가 마르크스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속인 셈이 되었다.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고난을 겪는 것을 보았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대해 경탄을 보내고 경의를 표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비록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4.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 맬서스, 『인구론』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녀모가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5.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대위의 딸』

피고의 범죄 부인이 그의 무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 맹자, 『맹자』

당연한 것이, '논어'는 말할 것도 없고 '맹자'도 축적된 삶의 경험이 제공하는 성찰의 능력이 부족하면 읽기 어려운 책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오랜 시간을 통해 발전되어온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종교와 문화, 민족의 가치관 유지를 주장하는 정치 이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겸손히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이 인仁의 시작이며 수오지심이 의義의 시작이며 사양지심이 예禮의 시작이며 시비지심이 지智의 시작이다.

 

인간은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하는 이타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유전적 근친성이다. 그리고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과정에서 협동정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같은 '사회적 재능'을 진화시켜 왔다. 이타 행동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재능은 먼저 유전적 근친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표출되어 낮은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귀함을 지니고 있건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 귀한 것이 아니다. 조맹趙孟이 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 <고자 상>

 

내가 남을 사랑해도 남이 나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인자한 마음(仁)이 넉넉했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智)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것이며, 예로 사람을 대해도 나에게 답례를 하지 않으면 공경하는 마음(敬)이 충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 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이루 상>

 

맹자는, 좌절마저도 아름다웠던,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대장부였다.

천하라는 넓은 집인 인仁을 거처로 삼고, 천하의 바른 자리인 예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인 의義를 실천하여,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나를 흔들 수 없고, 빈천도 나를 바꿀 수 없으며, 위세와 무력도 나를 꺾을 수 없어야, 비로소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등문공 하>

 

 

 

 

7.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 최인훈, 『광장』

명준은 사령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총공격이 가깝게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알렸을 때, 은혜는, 방긋 웃었다.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네?"

 

 

 

 

8.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 사마천, 『사기』

권력은 마주 서 있을 때보다는 함께 서 있을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역할의 전도'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시기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에도 옛날 방식으로 응전함으로써 실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부른다. 구시대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 시대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도태되고 만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2000년은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시기심, 권력욕, 공격성, 독점욕은 그대로 살아 있다. 제도와 문화와 의식이 진화했기에 그런 욕망의 표출이 절제되고 견제될 따름이다.

20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터져 나왔던 인간의 야수성은 그럴듯한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9. 슬픔도 힘이 될까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0.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 다윈, 『종의 기원』

다윈은 인간을 순전히 이기적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에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발전시킨 고귀한 도덕적 재능의 소유자로 보았다. 다윈은 인간 사회를 벌거벗은 생존의 욕망과 경쟁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이라는 이름의 약육강식이 정당화된느 정글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다윈은 국가의 공중 보건 정책과 사회복지 정책을 "우리 본성의 고결한 부분"이 만들어낸 것이며, 만약 이것을 버린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과 "극도의 죄악"이 공존하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노출시켰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누구나 다위만큼씩만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이타주의에 공감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

 

 

 

 

11.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 베블런 『유한계급론』

배블런에 따르면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돈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 때문이다.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해 소비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데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는 것이 돈을 버는 목적이다. 돈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그 정도로 재산이 많으면 더는 돈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위치에 가면 그 역시 재벌 총수들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재벌 그룹의 총수는 '금전적 경재' 또는 '돈으로 겨루기'에서 다른 재벌 그룹 총수를 제압하려는 욕망에 불탄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의 행복은 내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내가 소유한 부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많으냐 적으냐에 좌우된다. 부를 축적하는 경쟁에서는 남을 이기는 것이 행복의 열쇠다. 부의 절대적인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야만 문화 전체를 통틀어 사회를 지배한 집단에게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한 계급은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은 인간 집단을 말한다. 준평화적 단계의 야만 문화를 지배하는 현대의 유한계급은 야만 문화의 약탈적 단계를 지배했던 유한계급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금전적 경쟁(pecuniary emulation)과 과시적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과시적 여가(conspicuous lsisure)다.

 

유한계급의 직업은 신분에 따라 다르지만 비생산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경제적 특징을 가진다. 이들 비생산적 상류계급의 직업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정치, 전쟁, 종교의식 그리고 스포츠와 관련되어 있다.

 

배블런의 관찰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의 야만 문화가 약탈적 단계에서 준평화적 단계로 이행하면서 성공의 지표가 약탈의 전리품에서 축적된 재산으로 옮겨간 것이다. 산없이 성장할수록 축적된 부가 더 중요한 명성과 존경의 인습적 기초가 되었다. 이제 사회에서 명성과 지위를 얻으려면 재산을 축적해야만 했다.

부의 유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든 부모를 잘 만나서 상속을 받았든 상관없이 부는 명성의 인습적 기초가 된다. 결국 처음에는 단순히 능력의 증거로 평가되던 부의 소유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굳어지는 것이다.

부는 생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유한계급은 생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부를 만인의 눈앞에서 입증하는 수단으로 소비를 선택한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이를 유지하려면 부나 실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부와 실력은 반드시 입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존경은 증거가 있어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시적 여가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요, 과시적 소비는 재화의 낭비다. 양자는 모두 부를 과시하는 방법이요, 똑같은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말하는 '낭비'는 이러한 지출이 대체로 인간 삶과 행복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뜻일 뿐, 그런 지출을 선택하는 소비자 개인의 입장에서 그것이 노력 또는 지출을 낭비하거나 오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비자가 어떤 형태의 지출을 선택하든,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그의 기호에 의해 그에게 효용을 준다. 개별적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면, 관련된 경제 이론의 영역 안에서 낭비라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낭비'라는 말은 기술적 전문용어일 뿐, 좌시적 낭비의 규범 아래에서 소비자가 가진 동기나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비난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유한계급에게는 가치가 가격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가격이 가치를 결정한다. 유한 계급의 과시적 소비 목적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효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지출을 통해 부를 과시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품질은 좋지만 값이 싼 보석은 아무 효용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값이 비싼 것이, 품질과 무관하게, 오로지 비싸다는 이유 때문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값이 비쌀수록 수요도 늘어난다. 이것이 소위 '명품의 경제학'이다. 곤란에 빠진 경제학자들은 베블런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드문 예외로 치부하여 논리적 파산을 모면했다.

 

지배적인 생활양식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태도"다. 그러너데 사회제도의 총체로서 한 시기의 지배적인 생활양식 또는 습관적 사고는 환경이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 한 무한정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전승되는 제도, 습관적 사고, 견해, 정신적 태도와 소질은 그 자체가 보수적인 요인이 된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

 

개인의 정신적 적응은 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압력이 강하고 개인이 기존의 지배적 생활양식을 고수하면서 그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약할수록 더 잘 일어난다. 생활환경의 변화가 주는 압력에 덜 노출되거나 둔감한 사람일수록, 그 압력을 버텨낼 힘이 있는 개인일수록 더 오래 정신적 적응을 거부할 수 있다. 유한계급이 바로 그런 개인들의 집단이다. 유한계급은 물질적 이익이나 기득권 때문에 보수적인 것이 아니다.

 

부유층의 보수주의는 공인된 행동 방식과 사물에 대한 관점을 벗어나는데 대한 본능적 반발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반감이며 오로지 환경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반감이다. 생활 습관과 사고 방식의 변화는 모두 성가신 일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부유층과 보통 사람이 다른 점은 보수주의를 고무하는 동기가 아니라 변화를 재촉하는 경제적 강제에 노출되는 정도의 차이에 있다.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혁신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강제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대체로 어떤 변화에나 필요한 재조정을 하기가 성가시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것이니 상처받지 말라고. 보수성은 유한계급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보편적 성향이라고. 그들은 다만 진보가 요구하는 인습적 사고와 행동 양식의 재조정을 귀찮아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활환경의 변화가 더 진행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사실이 그런 것 같다.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유권자들이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물신숭배 문화를 충실히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준평화적 야만 문화' 단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나라가 매우 심한 편이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혁신과 진보는 언제 어디서나 저속하고 품위 없다는 인습적 비난에 봉착한다는 베블런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 위로를 받으면서 자문해본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2.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 조지, 『진보와 빈곤』

기술 진보의 경제적 혜택을  토지 소유자가 지대 형식으로 독점하기 때문에 근로대중은 영원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다만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는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조지의 '진리'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여 일반적으로 이익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아마도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 헨리 조지를 읽으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걸 실현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일지도 몰라. 행하기 쉬운 진리에는 매력이 없는거야. 그러니까 '근본적 변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 자체가 멋지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진리의 벗'들, 그들의 몸부림이 아름다워서일지 몰라.

 

 

 

 

13.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방송이 시시각각 전하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만나는 정보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정보의 진실성 여부 또는 '진실 함유도'를 정확하게 따지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다,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뵐은 후기에서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14.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 : 카, 『역사란 무엇인가』

사실 랑케의 견해를 그대로 밀고 나가면 역사가가 할 일은 문헌과 사료를 가위로 오린 다음 보기 좋게 풀로 이어 붙이는 작업뿐이다. 카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 이론이 진리의 일면만을 포착하고 있음을 논증했다.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또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기의 잠재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다. 현대인도 5000년 전의 조상보다 더 큰 두뇌를 가진 것이 아니며 더 뛰어난 선천적 사고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여러 세대의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경험과 결부시킴으로써 사고의 효율성을 몇 배로 확대하였다. 생물학자들이 부정하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야말로 사회 진보의 토대인 것이다. 역사는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다.

 

 

 

후기

이 책은 위대한 고전에 대한 균형 있는 서평이 아니다. 나는 이 고전들의 어떤 특정한 측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 책들과 내 마음이 날카로운 마찰이나 다정한 공명을 일으켰던 접점을 다루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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