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잠언록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성철스님 잠언록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한 자신 안에 모든 진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참 나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는데, 참 나를 발견 못한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신을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말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몇몇 성인들이 알려주고 간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이들은 종교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진정한 삶은 물질적 이득에 있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은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씀을 말로 따라 하기는 쉬워도 몸으로 실처너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 신과 보통사람은 다른 거야'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1.무소유의 행복
현재 삶 속에서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맑고 투명한 생의 빛을 발하느냐, 발하지 않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도 진리 추구를 위한 방편이라고 말합니다. 불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보다는 진리가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에로 가는 가장 적합한 길이 불교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종교만 진리라고 우기고 다른 종교를 부인하면 그 자체만으로 이미 '권력'을 추구하는 셈일 것입니다. '권력'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흑백논리에서 생겨납니다.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 거만함은 마치 네 개의 독화살과 같아서 모든 병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또한 밖에서 오는 독화살은 막을 수 있지만 안으로부터 오는 독화살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 아함경
조주 스님의 '무소유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 스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말했습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내려놓게나."
'내려놓긴 뭘 내려놓으라는 겐가. 소문하곤 달리 꽤 물질을 밝히시는구먼.'
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습니다.
"빈손으로 왔는뎁쇼."
조주 스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럼 계속 들고 있게나."
"......?"
조주 스님은 인사치레로 뭘 가지고 와야 된다는 형식이나 의례에 얽매여 생겨난 미안한 마음마저 부정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빈손으로 오는 것 자체에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무소유의 마음을 더 깊이 파고들어 갑니다.
진정한 무소유의 삶은 단지 물질 없이 사는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마음마저도 어떤 형식이나 의례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인생의 아름다움
진실로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사람(집착심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낟. 자, 보라.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 여기저기에 얽매여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 우다나 이티붓타카
'이 사람들은 내 친구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래!' 이런 마음은 이기적인 태도이지 자비가 아니다. 진정한 자비심은 적에게도 미친다. 왜냐하면 자비심은 다른 중생이 고통 받는 걸 볼 때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중생에는 나의 적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3.색즉시공의 원리
어떤 한 가지 견해나 입장에 근거하며 '다른 것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본다면 이는 진리의 길을 가는 데 가장 장애가 된다. 그러니 보고 듣고 배우고 사색한 것에 너무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지혜에 관해서도 도덕에 관해서도 편견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는 남과 동등하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 나는 남보다 뛰어나다.' 이런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싸움은 정의(正義)를 가장하지만 사실은 이기심과 증오에서 비롯된다.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질투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허머에 직면하여 두려워 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 부려 만용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며, 지혜롭게 중도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모습이다.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중도를 지켜라. - 잡보 장경
성철 스님은 강조합니다.
"생사란 모를 때는 생사입니다. 눈을 감고 나면 캄캄하듯이. 알고 보면, 눈을 뜨면 광명입니다. 생사라 하지만 본래 생사는 없습니다. 생사 이대로가 열반이고, 이대로가 해탈입니다. 윤회를 이야기하는데 윤회라는 것도 눈감고 하는 소리입니다. 물론 사람이 몸을 받고 또 받고 하여 이어지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윤회라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은 자유입니다. 일체 만법이 해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현실을 바로만 보면,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입니다."
4.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의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은 모르는 듯합니다. 성철 스님은 단지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구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이나 할 것 없이 그들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줍니다. 절대 나하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나 나보다 더 나은 처지의 사람을 도와 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단호히 우리의 동정심을 꾸짖습니다. 남을 동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부처님인데, 단지 세상에 나타난 모습이나 사회적 처지가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하철에서 마주친 장님 걸인이나,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걸인을 보고 '동정심'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보고 잠시라도 내가 우쭐한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러한 마음에서 그들에게 동냥을 하려고 했다면 큰 잘못입니다. 다시는 부처님을 몰라보고 큰 무례를 저지르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차별 없는 자비심을 강조한 성철 스님은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영원(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불멸의 길을 닦으라 했는데, 불멸의 길은 곧 중생에게 차별없는 자비를 베푸는 일인 것입니다.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우주의 원칙입니다. 콩 심은 데 팥 나는 법 없고 팥 심은 데 콩 나는 법 없으니, 나의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육체적 상처든 정신적 상처든 다들 남모르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그 상처로 평생 그늘져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상처를 극복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며 상처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서'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 의지의 행위이며, 용서한다고 일단 의지를 세우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그 결단의 뒤에 오는 문제,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입 밖으로 용서한다고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 자꾸 또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용서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제일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참회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참회함으로써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합으로써 남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성철 스님도 남을 용서하기보다는 참회를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나 먼저 나 자신을 용서(참회)함으로써 나에게 상처 준 자를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 벽암록
외국의 한 명상 수행가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들 저절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삶을 관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사실을 영영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연히 얻어진 우리의 삶을 어떨 때는 지겹다고, 또 어떨 때는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게 삶의 경이를 모르기 때문이고 삶의 기적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두 눈에 비쳐 들어오는 산과 바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인간들과 온갖 인간 사회의 진풍경들. 이것들 하나 하나가 기적입니다. 한번 두 눈을 감고 귀도 막고 나서 아주 생각도 없는 상태로 몇시간이고 지내보십시오. 한마디로 캄캄한 동굴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것입니다. 그런 상태의 괴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이 삶의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무소유와 수십 년간의 장좌불와의 수련 속에서 그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처님이고 날마다 생일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들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생일입니다. 부처님의 생일입니다. 우리 모두 손뼉치며 노래 부르며 경사를 함께 나누어야 할 일입니다. 생의 축제의 주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몇 푼의 돈에, 지푸라기 같은 명예에 이 소중한 진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로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공포를 초월한다. 헛된 삶으로 이끄는 그릇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무거울 것이 없는 것 처럼, 집착을 여의고 애써 노력하며 피안에 이른 사람은 목숨을 다한 것에 만족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죄수처럼, 진리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여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아쉬움도 없는 사람은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집에서 무사히 빠져 나온 사람처럼. - 아함경
여기서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들여다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나므이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혀너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견해나 사상에 대해서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또한 종교적 행위에도 끌려가지 않으며 마음의 어떤 유호거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차별의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속박이 있을 수 없다. 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는 미망이나 착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편견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 숫타니파타
정신이 위주가 되어 물질을 지배해야 합니다.
범부들은 눈앞 현실에만 급급하고, 수행인은 마음만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과 외부 현실 양쪽 다 뛰어넘는 이것이 참된 수행의 길이다. 현실에만 맹종하는 것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인 줄 알고 찾아가는 것과 같고, 마음만을 고집하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바깥 현실과 안의 마음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거기에만 집착하면 양쪽이 모두 병이다. - 선가귀감
5.해탈의 길
만약 갖가지 수단으로 우리를 헐뜯더라도 그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들을 비방한다고 하여 우리 역시 분노로 그들을 해치려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저들에게 지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우리를 칭찬한다고 해서 기뻐하고 들떠서도 안 된다. 공연한 칭찬에 마음이 들뜨는 것도 우리 스스로가 저들에게 지는 것이니라. - 장아함경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그릇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참회하는 마음을 따라 사라질 것이다. 참회란 지은 허물을 뉘우쳐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함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 허물을 드러내는 일이다. 사실 마음이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이 깃들 곳이 없다. - 선가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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