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아는 것이 지식이라면
자신을 아는 것은 참된 지혜이다.
남을 이기는 것이 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을 이기는 것은 진정 강한 것이다.
족할 줄 아는 것이 부유한 것이며
억지로 행하는 것은 고집스런 것이다.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고
죽어도 멸망하지 않는 것이 진정 장수하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을 바깥으로 향한 채 살아간다. 나방이 불빛에 현혹되듯, 우리 인간도 외계의 사물에 현혹되어 한 평생 정신없이 밖으로 치달으며 살다가 덧없이 죽는다. 자기 본성의 고귀함을 잊어버린 채 누구는 지식(智)에 눈이 팔리고, 누구는 권력(力)에 눈이 팔리며, 누구는 재물(富)에 눈이 팔려 분주히 한 평생을 뛰어다니다가 끝에 가서는 허망하게 죽고 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재물을 못얻는 자는 더 허망하겠지만, 설령 권력이나 재물을 얻은 자라 하더라도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내면이 천박하고 그릇이 종재기의 수준에 불과한 자들이라면 자기가 거머쥔 권력이나 재물 따위로 인생이 더 없이 만족스럽겠지만, 제대로 된 인간성을 지닌 자라면 결코 권력이나 재물 따위 외계의 사물로써 인생의 참된 만족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다. 어떻게 인간들의 놀음인 권력, 재물 따위가 인생의 참된 기쁨을 보장해 주겠는가? 권력과 재물 따위로 남 앞에 잘난체하고 뻐겨볼 수는 있겠지만, 그거야 그뿐이지 거기에 무슨 참된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부박하고 허황된 삶의 양식을 버리고, 밖으로 향하던 눈을 안으로 돌려 그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라.
그리하여 그대 존재의 근원에서 도(道)를 발견하라. 천지 만물이 거기에서 나오고 다시 천지 만물이 거기로 돌아가는, 저 영원한 도를 인식하라. 도를 알게 되면 그대에게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며, 사물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우주와 인생에 대하여 참된 자각을 갖게될 것이며,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것(智),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力), 진정으로 부유하다는 것(富)이 어떤 것인지를 새롭게 정의하게 될 것이다.
주자는 이 격물치지론을 가장 요긴한 공부법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선비가 일일일격(一日一格 : 하루에 한가지 사물을 끊임없이 격하여 궁구함)하여 나날이 그 공부가 쌓이면 마침내 활연히 관통하여 도(道)에 이르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고 허황된 수사학이다. 도는 결코 이렇게해서는 얻을 수 없다. 주희가 말한 것은 도(道)가 아니라 학(學)일 뿐이다.
도(道)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대로 사물을 잊어야 하며, 세상을 잊어야 한다. 사물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사물을 내려놓고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머리를 써서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것,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그것은 학(學)이다. 마음을 텅 비워 허의 극치에 잠겨서 어떤 사념도 일지 않을 때, 그때 불현 듯 도(道)가 드러난다. 학(學)은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낸 세계이지만, 도(道)는 우주가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 세계이다. 인간의 생각과 의도와 선택이 개입되면 도(道)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 이것이 학(學)과 도(道)의 차이이며, 지(智)와 명(明)의 차이이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자기 자신에 충실 하라. 항상 도(道)에 대한 자각을 지니고, 자신을 반성하며 성찰하라. 진정으로 강한 자는 으시대지 않는다. 그는 잘난체하지도 않고, 남과 경쟁하여 굳이 이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묵묵히 무위자연의 도에 따르며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재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온 세상이 재물에 미쳐 날뛰지만, 물욕을 자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자가 진정으로 부유한 자이다. 족할 줄 모르면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재물의 노예일 뿐이다. 그룹의 회장이요 총수라는 자들이 그 많은 재산을 두고도 또 회삿 돈을 해먹다가 쇠고랑 차고 교도소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들이 부유한 자라고 해야 할지 곤궁한 자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대체로 한국에는 '부유층'은 있는데 '부유한 자'는 별로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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