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들어가면서

현대사회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룩했음에도 지구의 한쪽에서는 여전히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아울러 기술의 무분별한 발달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태계의 복원에 재원이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대량의 살상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또한 사람들은 가질 만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욱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 결과 인간 간의 갈등과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져 가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현대인들이 이제 더 이상 이러한 현실을 위기로 느끼지 못한 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체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들은 거대조직사회에 적응하기 바쁘고 사회의 유능한 부품이 되고자 노력할 뿐이며,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과 사회를 자신의 힘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깊은 체념과 절망에 빠져 있다.

 

 

2장 프롬의 생애 ― 존재양식에 따른 삶

그는 모든 공인된 이데올로기와 공적인 선언 따위에 대해서 극도로 회의적이 되었으며,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환자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함께 관심을 가져 주고 환자를 따뜻하게 대하면서 환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심리치료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프롬이 주창하는 존재양식에 따른 삶
1)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사고에 입각한 삶이다.
2)존재양식의 삶은 소유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 대해서 연대감을 경험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3장 『소유냐 존재냐』 읽기

1. 서론: 위대한 약속, 그 좌절과 새로운 대안
1) 환상의 종언

물질적 풍요의 실현을 통해서 모든 감각적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킨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형성한다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제라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기호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뜨기 시작했을 때 끝나버렸다.

경제의 진보는 여전히 풍요한 나라에 국한되었고,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벌어졌다.

기술의 진보 그 자체가 생태계의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낳았으며, 이 중 어느 하나나 혹은 둘다고 인해서 모든 문명과 모든 생명은 종말을 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위대한 약속이 좌절된 이유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욕망의 충족으로서의 쾌락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쾌락에는 반드시 불쾌감이 뒤따르며, 따라서 인간을 그의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감각적인 욕망을 우리가 과도하게 충족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구토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우리가 감각적인 욕망을 탐닉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욕망은 무한하게 확장되면서 우리를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의 산업사회란 과연 '감각적인 쾌락을 무한정하게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최대의 사회적 실험실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있다.

이기주의란 소유를 목표로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많은 것을 혼자서 소유하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 더 많은 소유가 삶의 목표라면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나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으며 소유해야 할 대상을 둘러싸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그들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정열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가져온다.

위에서보듯 현대산업사회는 병들어 있으며 이러한 사회체제는 병든 심성을 낳고 이렇게 병든 심성은 다시 병든 사회를 낳는 악순환을 심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변혁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것 외에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대인의 심성구조에 근복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불가결의 조건으로 한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근본적인 인간변혁의 필요성은 윤리적 혹은 종교적 요청으로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서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역사상 최초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심성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존하게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프롬은 현대자본주의를 규정하고 있는 인간심성을 소유지향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심성을 존재지향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오늘날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2.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1) 소유와 존재의 차이

프롬은 특히 현대에는 사물들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세련되게 자신의 소비 대상으로 삼을수록 자신의 존재도 더 풍요롭게 되고 더 세련되기 될 것이라고 믿는 소비주의가 극단에 이르기까지 추구되고 있다고 본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 나는 소유한다.or 나는 소비한다.'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여가활동이란 것도 사실은 소비행위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서는 자동차, 텔레비전, 여행, 섹스가 주된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소비행위는 흔히 능동적인 여가활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이러한 소비행위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고 개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단순히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비행위는 언뜻 보기에는 사물들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능동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물들에 의존하여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려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소유양식에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한갓 나의 소유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며 나 역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규정됨으로써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 된다. 사물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서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예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유양식은 주체과 객체 모두를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며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죽은 관계가 된다.

'소유'에의 욕망이 지배하는 인간관계는 답답하고 부담스러우며 갈등과 질투로 가득 차 있다. 소유를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거나 찬양하는 인물을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독점하기를 바라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려고 할 경우에는 질투하고 경계한다.

 존재지향적 삶이라는 말로 프롬은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면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소유양식의 삶에서 나는 자신을 세계와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며 세계를 가능한한 나의 소유물로 만듦으로써 세계 안에서의 나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한다. 따라서 삶의 소유양식에서 세계와 나의 관계는 소유나 점유의 관계가 되며,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나는 심지어 나의 육체까지도 나의 소유 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따라서 현대 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기계를 사용하듯 혹사하며 자신의 육체를 성능좋은 기계처럼 만들려고 한다.
이에 반해 존재양식에서 나는 자신을 세계와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세계와 자신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느낀다. 존재양식에서 나는 다른 인간들이나 사물들과 대립되는 협소한자아에서 탈피하여 다른 인간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며 다른 인간들과 다른 사물들의 성장을 도우려고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서 충만한 만족을 느끼면서 인간을 비릇한 모든 자연물에 대해서 사랑을 느낀다. 프롬에게 사랑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책임, 그리고 존경이다. 소위 사랑에 '존경’이 결여되어있을 경우,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한다. 존경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이러한 존경은 상대방에 대한 통찰을 전제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뜻을 다 받아들여 준다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의 왜곡된 심성과 그 원인까지 통찰하고 상대방이 그 왜곡된 심성의 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소유양식에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우위 속에, 자기의 힘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복하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 있다. 이에 반해 존재양식에서 행복은 사랑, 공유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 있다. 프롬은 보통 우리 개개인에게 소유지향적인 성향과 존재지향적인 성향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며 그 양자는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이 약화되는 관계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프롬은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2) 시에 나타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
3) 일상경험에 있어서 소유와 존재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면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정보에 의문의 제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하는 주요한 형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장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지배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쉽게 핀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관념은 두려운 것이다.

존재양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은 강의를 들을 때 말과 관념의 수동적인 저장소가 되지 않고 귀를 기울이면서 '듣는다.' 이들은 강의의 내용에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한다.' 새로운 의문, 새로운 관념, 새로운 전망이 그들 머릿속에 생긴다. 그들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통해서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강의를 들은 후에 듣기 전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이 된다.

대화가 소유양식에 따라서 이루어질 경우, 중요한 것은 대화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의 논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의견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기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더 그럴듯한 논거를 발견하는데 열중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자신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견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경우의 대화란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아니며 하나의 논쟁에 불과하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의 주인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한 의견과 사상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예속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이 반박되면 자신의 존재도 반박되고 부정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의견이나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특정한 종교적인 신조나 정치적 이데을로기를 광신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 진정한 대화에서는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에 임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에 자발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위에 관해서도 잊어버린다. 그들은 기존의 자신의 자아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상대방의 생각에 충실하게 반응할 수 있고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양식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데 열중하는 반면에, 존재양식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다른사람들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고려함으로써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데 열증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걱정하지 않으므로 대화할 때 극히 활기를 띤다. 그들의 활기는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폐쇄된 에고를 초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리하여 대화는 상품(정보, 지식, 지위)의 교환에만 그치지 않으며 또한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 대화가 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함께 춤추기 시작하며 승리 혹은 슬픔 一둘 다 무익하다一 을 가지고 헤어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헤어진다."

그들은 현란한 치장이나 의례를 통하지 않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인간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도로 계발된 사람들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러한 '존재' 권위를 항상 원하기 때문에 그러한 권위의 소유자를 접하면 대단한 열의를 갖고 그들에게 반응한다. 한편 아이들이라도 아이들에게는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가하는 압력이나 방임과 '과잉보호'에는 반항한다.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의 기만성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표면을 꿰뚫고 비판적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소외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존재양식에서 인식이 이와 같이 '더 깊이 아는 것'이라면 소유양식에서의 인식은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프롬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적인 존재로서, 즉 무한한 신성을 갖는 자로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무한한 신성을 실현하는 것을 인간의 사명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무한한 신성은 무한하기에 어떠한 대립자도 갖지 않으며 인간이 그것을 실현할 경우에는 모든 사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그러한 사물들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도울수 있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무한한 신성에 고행이나 외면적인 종교적인 의례를 통해서 도달할 수는 없다. 고행이란 이미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행이며 그것은 육체를 적대시하는 방식으로 이미 자신의 대립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대립자를 전혀 갖지 않는 무한한 신성에 도달하는 길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이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에 얽매이는 그만큼, 달리 말하면 자신과 그 소유물을 동일시하는 그만큼 인간의 자유는 제약당한다. 인간이 자신이 소유하던 기업이 망했다고 자살할 경우, 그는 자신과 이 기업을 동일시한 것이고 이 기업의 소멸을 자신의 소멸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래 무한한 자기를 유한한 사물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왜소하게 만 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크하르트는 모든 의지를 버릴 것을 주장하는데 이 경우 의지는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 즉 갈망과 동일한 뜻이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더 나아가 신을 열망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도 신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일종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존재양식의 종교가 유신론적인 경우에 신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인간 자신의 힘'의 상징이다.
이에 반해서 소유양식에서 종교는 우상에 대한 숭배가 된다. 존재양식에서 신 내지 절대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고 정의와 사랑과 지혜를 자신의 본질로 갖는 무한한 신성의 상징이지만, 소유양식에서 그것은 우상이 된다. 이 경우 신은 우리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무한한 신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종족만을 사랑하며 이들에게 그러한 사랑의 대가로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특정한 계율이나 신조를 강요하면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제대로 지키고 승배하는지를 감시하는 자로 나타나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모든 것을 구입할 수있는 힘을 주는 돈 혹은 독일 민족과 같은 특정한 민족이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특정한 계급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우상승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종교적인 교의 체계나 이데올로기 혹은 우상과 일반인들을 매개하는 사제나 지도자들에 의존하게 된다.

사람들은 우상과의 합일을 통하여 안정과 힘을 얻었다고 확신할지 모르나 사실은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자신을 약화시키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유한한 것이 절대화되면 그것은 그것에 맞서는 모든 것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역사는 자신들과는 다른 모든 것들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잔혹의 역사이다. 우상은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서는 '자비로운 신'으로 찬양될지 모르나 어떠한 잔학행위가 그의 이름으로 자행될지 모르는 것이다.
존재양식의 종교는 인간과 인간의 힘 그리고 인간이 이상으로 여기는 가치들인 이성과 사랑 그리고 정의를 중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종교에서 인간 삶의 목적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전능한 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최대의 힘을 달성하는 것이다. 미덕은 복종이 아니라 자기실현에 있다. 소유양식의 종교에서는 자신이 신적인 계율이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을까 두려워하는 비애와 죄악감이 지배적인 반면, 존재양식의 종교에서는 자신의 무한한 힘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실현했을 때의 기쁨이 지배적이다.

"사랑이 생산적인 능동성인 이상 우리는 사랑 속에 '있거나' 사랑 속을 '걸을' 수 있을 뿐이며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빠진다는 것은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진정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파트너를 통해서 사랑의 감정을 회복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르나 그들이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의 사랑은 사랑에 '빠지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고양시키는 능동적인 사랑이 될 수는 없다.


4)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소유와 존재

5)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소유개념과 존재개념

성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경우의 마음의 가난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단순히 물질적인 빈곤과 같은 '외면적인' 빈곤을 넘어서 '내면적인' 빈곤, 즉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해석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고행이나 외면적인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낟.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아직 이기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외관으로는 성자와 같다는 평판을 얻지만 내면에서는 그들은 바보이다. 그들은 신성한 진리의 참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가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어 '기술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존재가 관계하는 것은 '경험'이며, 인간경험은 원칙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3.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1) 오늘날의 소유양식이 갖는 특성
2) 소유양식의 지배에 대한 저항과 자유의 진정한 의미

사람은 자라면서 그의 자발적이고 진정한 욕구와 관심 그리고 의지를 포기하고 사회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부과된 의지, 욕구, 감정을 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사회 및 사회의 대리자로서의 가정은 '한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그가 모르게 꺾을 수 있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나 교화, 보수, 징벌, 적당한 이데올로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 과제는 대체로 아주 잘 해결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의 의지 자체가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유는 모든 지도원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고 인간존재의 구조법칙에 따라서 '성장하는' 자유이다. 그것은 가장 알맞은 인간발달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는 우리가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을 구현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구현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될수록 더 커지게 된다.


3) 196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자기 희생은 종종, 사랑하는 것을 열망하지만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 된다.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데서 고도의 사랑의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자기희생적인 젊은이들은 '사랑의 순교자', 즉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죽어야 할 때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 프롬은 그들의 혁명적 반항과 자기희생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고독과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동과 청년이 나태해지는 것은 학습자료가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만일 학습자료가 생상한 방식으로 제공된다면 놀랄 만한 능동성과 창의성이 발휘되리라고 프롬은 본다. 이런 의미에서 프롬은 인간이 이기적으로 되고 나태하게 되는 것은 소외된 학습과 소외된 노동구조 등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일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고 또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면 전에는 노동에 흥미를 갖지 않았던 자들도 크게 달라지며 놀랄 만큼의 창의성과 능동성 그리고 상상력을 바루히하게 되고 자신의 일에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4) 존재양식의 본질적 특성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유혹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에 의존함으로써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에서 비롯되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여기서 나의 중심은 나 자신에게 있으며 나를 좌우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거나 유한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표현하고 발휘함으로써 성장한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은 표현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존재양식에서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자신 속에 있다. 즉 생명과 자기의 생산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 속에, 내적인 나태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자신을 예속시키려는 심리 속에 위협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개성을 무시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어떤 인물에 대한 찬양과 사랑을 나누어 갖는 것, 사상을, 음악을, 그림을, 상징을 나누어 갖는 것,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나누어 갖는 경험은 두 개인 간의 관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또 그 생명을 유지한다.

 

5) 쾌락과 기쁨의 구별

프롬은 기쁨과 쾌락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대부분의 경우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차이를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를 프롬은 우리가 보통 '기쁨 없는 쾌락'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열은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조건의 타당한 해결을 가져오지 않는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정열은 보다 큰 성장과 힘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들은 순간적인 '흥분'을 가져오지만 '기쁨'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러한 쾌락들에는 기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새롭고 한충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은 생산적 능동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갑자기 최절정에 이르렀다가 소멸해버리 는 '절정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의 본질적인 인간능력의 생산적 표현에 수반되는 감정 상태이다. 쾌락과 스릴은 절정에 이른 뒤에 슬픔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스릴은 경험했지만 스릴을 느낀 사람은 아무런 성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그 전의 텅빈 내면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능동적으로 존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경우 인간의 선을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변덕스런 욕망도 아니고 신의 변덕스런 의지도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참된 인간성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가장 적절한 성장과 행복을 가져오는 규범이다.

 

6)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에서 죄와 죽음

아울러 우리가 소유양식 속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란 사실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데 대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소유물, 내 동일성을 잃는 데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갈망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진다. 이는 우리가 잃어버릴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양식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극복하고 기쁨에 찬 삶을 살게 된다.

 

7) 금욕주의와 조야한 금욕주의에 대한 비판

존재양식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우리의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적인 삶의 태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금욕적인 사람은 소비를 억제하려고 하는데 그는 사실은 소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를 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잉보상(어떤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 그반대의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의한자기 부정은 정신분석의 데이터에서 매우 자주 보인다. 이것은 파괴적인 충동을 억압하고 있는 광신적 채식주의자, 살인충동을 억압하고 있는 광신적인 인공유산 반대론자, '죄 많은' 충동을 억압하고 있는 '미덕'의 광신자 같은 경우에 일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프롬은 또한 소유와 관련하여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이렇게 절대적인 평등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실은 소유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와 원한에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실이 다만 엄격한 평등이란 신조에 의해서 표면상 부인되고 있을 뿐이다.

소유를 인생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보다 타인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부러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8)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에서의 시간

 

 

4.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1) 종교, 성격, 사회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 철이 들게 되면 자신이 모든 것이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낯선 세계에 내던져져 있으면서도 이 세계를 자신이 살아야 할 세계로서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인간은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간은 세계와 자신의 존재의미를 밝혀주고 자신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할지를 지시하는 지향의 틀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불안, 즉 인간이 본능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성을 갖게 되면서 세계를 낯설고 덧없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불안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은 없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주는 세계상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는 보통 니힐리즘이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태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인간들의 일차적인 욕구는 참된 세계상과 헌신의 대상을 갖는 것보다는 진실이든 허위든 상관없이 일단은 하나의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하여 한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불안의 해소이지 진실의 확보가 아닌 것이다.
프롬은 현대 서구사회에서 외관상으로는 여전히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돈을 신으로 승배하는 산업종교가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고 '산업종교'라는 새로운 '비밀'종교가 사실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신에게 빌더라도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게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사람들은 신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자신이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신이 상징하는 사랑과 지혜가 아니라 부와 성공인 것이다. 이러한 산업종교는 진정한 기독교와는 완전히 모순되며 그것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이 만든 경제와 기계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한다.

 

2) 산업종교와 시장적 성격

시장적 성격의 퍼스낼리티는 자신이 집착할 만한 자아조차 전혀 '가질' 수 없다. 그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킨다. 시장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단지 최대의 능률을 가지고서 움직이고 일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은 '왜' 사는가, '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 방향으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물음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항시 변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진정한 자기, 핵심,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물건이 주는 위신이나 위안일 뿐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친구나 애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물건과의 유대 이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친구나 애인도 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3) 진정한 기독교 정신의 역사
4) 진정한 기독교 정신의 몰락
5) 휴머니스트의 저항

프롬은 인간의 본질과 인간성의 변화는 단순히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인간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 이외에 자기혁신을 위한 인간 개개인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많은 정치적 혁명가들은 사회경제적 구조를 변혁하면 인간의 정신이 자동적으로 변화되리라고 믿었는데 이는 그들이 인간의 정신을 지나치게 수동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자유를 두려워하면서 권위에 예속되기를 바라는 인간 내면의 퇴행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했다.

소유의 평등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천박한 공산주의는 선망과 질시에 바탕을 둔 평균화에 불과하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해방이 원래 단순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는 정치적인 문제이기보다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라는 것, 즉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와 기업의 운영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2,3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존재로서만 살아왔다." 인간성이 위축되고 그와 같이 인간성이 위축되고 왜곡된 부모에 의해서 어린아이들이 양육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인간적 성장에 필요한 본질적 요인은 결여되고 만다. "이윽고 어른이 된 사람 역시 과잉노동을 강요받고 천박한 오락에의 욕구에 넘어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게 된다. ... 절대적인 수동성, 자기를 피하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욕구가 된다."

 

6) 존재지향적 태도를 갖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a. 인간에게 소유욕이 존재하는 한 인간간의 갈등은 불가피하며 개개인은 자기 자신의 현상태에도 만족할 수 없다. 소유욕은 인간의 자기 분열과 아울러 인간 간의 분열을 야기한다. 따라서 모든 소유물을 자진하여 포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소유욕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며 주변 세계와 진정한 연대를 맺을 수 있다.

b. 저축하고 착취하는데서가 아니라 주고 나누어 갖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c. 생명의 모든 현상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정교한 기계와 상품 그리고 권력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그것의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든 생명체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력하도록 힘쓴다.

d. '지금 여기에' 완전히 존재한다.

e. 사악함과 파괴성은 성장에 실패함으로써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와 동포의 완전한 성장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f. 자기 이외의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도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

g.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으면서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지도 않는다. 천진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자기 자신을 통찰한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자기까지도 통찰한다.

h.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양을 한다. 그러나 꼭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야심은 없다. 그와 같은 야심도 탐욕과 소유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항상 성장하는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낸다.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7) 인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의 형성

프롬은 소비의 증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인 법칙에 의해서 사람들이 소비인이 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롬은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의 경우 소비가 이미 해로운 단계에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프롬은 생산과 소비의 증대를 목표로 삼는 경우, 사람들은 건전하면서도 정당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소비하려고 하는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고 피동적인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생산은 건전한 소비를 위한 것에 제한되어야 한다.

소득격차와 관련하여 프롬은 모든 사람들의 소득을 평준화시킨다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보고 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품위를 가지고 살 수 있는 토대가 될 소득인 것이다. 소득의 불평등은 소득의 차이가 인생경험의 현격한 차이를 초래하는 선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될 것이라고 프롬은 보고 있다. 수백만 달러의 소득을 가짐으로써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변덕이든지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과 하나의 값비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욕망을 희생해야 하는 삶과는 인생의 경험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득이 얼마나 많고 더 적으냐 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점에서 소득의 양적 차이가 인생 경험의 질적인 차이로 변환되느냐 하는 것이며 그 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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